화가들의 재료와 도구 - 붓을 안쓰고 작업한 18년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453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1.19. 17: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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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1

S 형,

나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오랬동안 나이프로 착색작업을 해 왔습니다.

화가가 자기가 사용해오던 재료와 도구를 다 내 던져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작품제작을 한 가장 유명한 예는 앙리 마티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가장 눈에 잘 띄도록 걸어 놓고 항상 경탄하고 질투한 마티스의 작품은 순간적으로 태어난 것 같은 간결한 필치(데생력)와 거침없이 채색된 원색의 찬란한 유화작품들 입니다. 마티스의 이런 작품세계는 아마도 크레타 섬 크노소스 미노스 문명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매력적인 여인이라서 ‘라 빠리지엔느’라는 별명이 붙여진 초상화로 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나의 기행문 ‘크레타섬의 추억’에서 언급 했습니다. 라 빠리지엔느와 마티스가 그리는 여인상은 대단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라 빠리지엔느는 피카소가 시작한 입체파 화풍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베르나르 앙또니오즈가 마티스는 색종이 작업을 하기 전에는 그렇게 까지 크게 알려 지지 않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티스는 그의 기법으로 계속 주옥 같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유화를 버리고, 물론 신체적인 장애 때문입니다만, 말년에는 커다란 가위로 색종이를 이렇게 저렇게 오린 미역줄기 같은 모양 등 갖가지 단순한 형태를 커다란 화면에 띄엄띄엄 붙이는 빠삐에 꼴레 작업에 몰두 했습니다. 마티스가 작업방법을 바꾼 것은 말년에 손이 떨려서 데생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원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그가 과거에 했던 작업과 생판 다른 것이 아니고, 누가 보아도 그것이 마티스의 작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게 하는 일 이었습니다. 이 우연한 작업이 마티스를 삽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마침내 그는 희대의 대가로 인정 받게 됐던 것입니다. 작가들은 때로 고민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나가도 될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깊은 고민에 빠져 마티스와 같은 대변화를 겪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02년 여름부터 새로 그리는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그림입니다만 나는 지난 18년동안 붓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나는 내 작업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전환되고, 그 후 나의 색채를 다 버리고 쓸쓸한 단색조의 작업을 했었고, 그런 후에 색채를 다시 꺼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색채를 다시 꺼내 냈을 때 또 다하나의 커다란 고민에 부딛혔습니다. 그것은 어떻해서든 나의 작품이 더욱 독창적이어야 하겠다는 문제 였습니다. ‘한번 친 피아노 음으로 쇼팽임을 즉시 알아 보게하는 것 같은 독창성을 원했습니다. 사인을 보고난 후에 작가가 누구로구나를 알아보게하기 보다 피아노 한음만 듣고도 그것이 쇼팽임을 알듯이 색 하나에서 오천룡임을 알도록 하는 방법 말입니다.

방법을 찾기위해서 그림도구중 절대 불가결한 붓의 사용을 포기 하면서 붓없이도 나의 모든 재능을 그대로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화붓을 모두 벽장속에 넣어 버렸더니 나의 화실엔 색과 빠렛뜨, 캔버스, 기름과 나이프가 나의 재료이자 채색도구로 남았습니다.

그 때부터, 1984년 부터 2002년 봄까지, 나는 18년동안 나는 붓을 사용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995년을 전후로 작품내용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전의 것은 구상작품의 연속이었고 그 후의 것은 나뭇잎 시리즈 작업인 추상세계 였습니다.

구상작품에선 아직은 약간의 볼륨감을 살렸고 그 형태의 윤곽을 검은 선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인접된 형태들과 공간여백에서 분리해 놓았습니다. 평면이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색의 깊이가 변해 보이는 나뭇잎에선 초기엔 칸막이를 계속 했다가 나중엔 칸막이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윤곽에 들어가는 가는 선을 만들 땐 어차피 한자루의 세밀한 붓이 필요하긴 필요 했습니다.

이러한 추구는 간단히 말해서 형태의 윤곽을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점점 문제로 삼기로 한 것이었고, 모든 형태는 색평면으로 처리 했습니다. 그 채색은 나이프만으로 하면서 나이프의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독창적인 기법에 성공했는데 스테인드 글라스나 칠보에서 보는 것처럼 투명하면서도 깊이도 있는 강한 색채를 칸막이를 만들어 분리해 놓는 기법 이였습니다. 나는 이 작업을 18년동안이나 계속해 나갔습니다.

내가 붓을 버리고 싶었던 충동은 아주 오래전 피치 못할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부터 시작됩니다.

고등학교때의 미술선생도 본교출신의 화가 셨습니다. 그 미술선생님은 이상하게도 미술시간에 미술실기가 아닌 수업, 기하 담당선생도 아닌데 콤파스와 T자를 들고 들어오셔서 입체기하를 가르치셨습니다. 보는 눈의 각도와 원근 가르키며 그것이 사물을 파악하는 미술실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만 따분하도록 재미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그 따분한 수업시간중에 내이름을 부르며 ≪ 오천룡, 사군자가 무엇이냐 ? ≫고 연관도 없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갑자기 몰라서 어떨결에 ≪ 모릅니다. ≫ 반 아이들 중에서도 그것을 아는 아이는 한 학생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술반원인데 그것도 모르단 말이냐’고 핀잔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그만 홍당무가 되었고, 그 후 동양화의 주된 주제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바로 사군자인데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 오래도록 창피 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나중에 가까운 친구에게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해 보고는, 가장 가깝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사람을 좌중에서 지목해 갑자기 창피나 면박을 주고 자기의 어떤 어정쩡한 처신이라도 아주 옳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이 고자 하는 기분나쁜 수법중의 하나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 였습니다.

그때 미술반에 가면 그 미술선생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루종일 쓰신 몇십개의 유화붓을 한아름 주고 빨아 놓으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년동안 의무적으로 선생님 유화붓을 빨았습니다. 빨아야 할 붓을 받는 날은 내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날 이었습니다.

미술반 준비실을 화실로 정한 선생님은 누가 붓을 제대로 빨아 줄 수 있는 가를 미술반 학생들에게 돌아가며 시켜 보고는 내가 제일 붓을 잘 빤다는 칭찬과 함께 그 일을 전적으로 내게 맡겼습니다. 옛날 같으면 먹을 갈게 하면 선생님의 수제자가 되는 것을 뜻했겠지요만은 나는 그 선생님을 별로 따르지 않았고 좋아 하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나를 그렇게 좋아 하지 않음이 역역해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게 너무 명령적이며 권위적 이였으며 왠일인지 나에게 자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붓을 매번 잘 빨아서 그림을 그리시는 준비실 문앞에 놓아드렸습니다.

유화 붓을 빨고 붓대를 청소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러가지 용해액이 있어서 쉽지만 그 때는 빨래비누 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붓을 헝겁으로 눌러서 붓속의 색갈을 짜낸 후 석유통에 휘져어 애머리로 먼저 닦아내고 석유를 신문지에 짜서 기름기를 빼내고 그런 후에 비누로 여러번 빨아내는 순서를 밟으면 붓이 깨끗이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술선생님 붓은 그런 순서로 빨 수가 없었습니다. 시너를 사용한 붓은 그렇게 해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선 그림을 빠른 속도로 그리기 위해서 테레핀보다 휘발성이 더 강한 시너를 사용했고 그래서 붓은 벌써 꾸덕 꾸덕해져서 굳을려고 했기 때문에 빨기에 아주 나빳고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도장용 페인트에서 쓰는 시너는 유화에 사용이 금지 된 것인데 그 선생은 약주를 좋아 하셔서 작품을 빠른 속도로 많이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량으로 만든다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생께선 그림을 아무튼 잘 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붓을 빨때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났었습니다. 내가 붓을 잘 빨아 놓았기 때문에 나에게 주는 붓의 양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나는 이 나쁜 기억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붓을 빨도록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 붓도 빨지 않을 려고 붓을 사용하지 않는 유화기법을 찾게 되었던 것 입니다. 내가 다른 기법을 찾고자 해서 얻은 결과를 보면서, 선생이 나에게 붓 빠는 일을 계속 시켜서 진절이를 치게 한 것도 잘 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구사용 문제는 대학다닐 때에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붓대신에 고무룰러를 사용해서 추상 작품을 해 본적이 있는데 그렇게 해 보니 나보다 먼저 룰러를 사용한 사람의 작업 효과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며 단지 그의 흉내를 내는 격이고, 더군다나 다루기에 너무 쉬운 장난 같아서 곧 실증을 느껴 룰러를 던져 버렸습니다.

구상, 추상, 비구상 아니면 설치미술이나 영상미술에 이르기 까지, 작가들은 독창적인 작품을 찾아 가기 위해서, 현대로 거슬러 올라 올수록 전통적인 익숙한 재료와 도구를 기피하면서 자기만의 어떤 재료와 도구를 발견해서 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유화기법에서, 독특한 기름의 사용,다른 용제(기름이 아닌)의 사용, 특이한 과정을 거친 방법으로 손수 만드는 캔버스, 상점에 있는 재료나 도구를 거부하고 옛날식 비법에 대한 연구 등으로 아무튼 재료를 남과 다르게 쓰면서 작품제작을 해 보려는 노력이 많습니다.

그러나 재료학이라는 중요한 과목이 있어 온 것 처럼, 그렇다고 아무 재료나 사용할 수는 없는 것 이니까 재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므로 재료에 정통해 있는 것 자체가 상당한 창조자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재료의 발견과 그 자유 자재한 테크닉 구사는 현대작가들이 풀어 내야 하는 문제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것은 거의가 작가들이 밝히기를 꺼리는 비밀에 속하는 사항 입니다.

가령 유화도구 일습을 작만하고 그림을 그릴 때 아무리 새로운 효과를 자기식인양 내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풍경화를 그린다면 벌써 누가 그렸던 방식의 풍경화를 그릴 것이며 , 추상화를 그린다해도 벌써 누군가 해본 추상화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쓰는 색과 누구나 사용할 줄 아는 똑같은 그림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누구나 쓰는 전통적인 모든 재료는 그것이 발달해 오는 동안 누구에게나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편리하게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나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선택과 기법에서 부터 좀 달라야 합니다. 이렇게 달라야 한다는 의식을 갖는 단계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전통적인 재료의 사용에 익숙해질 만큼 훈련되고 표현 능력도 갖춘 다음이어야 함은 물론 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을 재료에만 의존 한다면 위험 천만입니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내용과 형식 두 요소가 서로 묶여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까지 얘기한 재료론과 도구론은 테크닉인 작품 형식만을 얘기한 것입니다. 재료 사용만을 강조하다보면 예술이 무슨 발명이나 발명특허품으로 전락할 것이며, 이것은 내용이 충실치 못한 현대미술이 당면하고 있는 함정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함정에 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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