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속에서 찾은 색채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222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1.09. 18: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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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10

S형,

방과후 미술반에 직행하는 일은 습관이 되버렸습니다. 미술반원들은 하루에 켄트지 4절지 수채화 한장씩을 서로 경쟁하듯 그렸습니다. 학교에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인지 그림그리러 오는 학생들인지 구별이 잘 안됐습니다. 사생하러 나갈때 낡은 베니아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 양철 빠렛트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어 넣고 물병으로 쓸 붓 꽃은 사이다 병을 들고 운동장을 통과 하면 운동반 친구들이 야 쟤네들 또 그림그리러 나간다 했습니다. 차린모양이 거지떼로 보이는 모양 이였습니다.

주말에는 한적한 고궁에 가서 사생을 합니다. 고궁의 풍경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겨울철만 빼고는 창경원에도 자주 갔지만 여름에는 경회루 연못의 연꽃을 그리러 경복궁에 갔고, 가을에는 고목이 많은 비원으로 단풍 든 숲을 그리러 갔습니다.

나는 덕수궁과의 인연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때 처음으로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서 가작상을 받은 곳도 덕수궁 이였습니다. 구석 구석을 안 그려 본 데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대학 다닐 때도 자주 갔습니다. 화판과 그림재료를 아예 궁전 툇마루 밑에 숨겨놓고 도화지만 들고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덕수궁엘 그림도구를 들지않고 빈손으로 달려 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당시 우리 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월간잡지사 학원이 주최한 전국중고등학교 미술공모전에 출품한 수채화가 중등부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공모 입선작 전시회는 덕수궁에서 열렸고 내 작품 밑에 달려있을 최고상이라고 쓴 리본을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뛰어 갔습니다.

우리 미술반원들은 그림그릴 소재를 찾아 학교 동네를 어지간히 두루 싸다녔습니다. 조용한 고궁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았지만, 골목풍경을 찾아 화동, 재동, 사간동, 삼청동, 안국동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걸어서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또 어느 방향으로 가보나 하는 것이 항상 걱정거리 였습니다.

이처럼 여기 저기 다 다닌 까닭은 무언가 좀 더 새로운 그림소재를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찾아다니다가 중도에 지쳐서 아무 것이나 그리자고 한 것이 아주 어려운 구도를 만나버려 힘들고 싫증난 김에 어설프게 완성해 가지고 터덜터덜 미술반으로 돌아오면, 오늘은 무엇을 어떻게 그렸나 하는 호기심들 때문에 그려온 작품들을 보면서 한마디씩 품평을 하게 되는데 ‘어 ! 이 구도가 뭐지 ? 새롭다 야! 오늘 천재 태어 났네, 탄생 했어!’ 큰소리로 놀려 댔습니다.

소낙비를 만나 빗물자국에 물감이 번져버린 수채화를 가지고 울상을 하고 돌아오면 선배들이 ‘야 ! 그거 그냥 놔두어 봐라, 이따가 선생님께 보여드려 보자. 그거 효과가 꽤 괜찮은 데 ! 걸작이다.’ 하면 나는 ‘ 정말입니까 ? 놀리는 것 아니지요 ?’ 반신 반의 하면서도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어디로 사생을 나가야 할지 영 막막 했습니다. 어디든 다 가본 곳 같아서 서성거리다말고 미술반 창문 아래 온실에 들어가 ‘여기선 뭐 그릴 께 없을까’ 두리번거려 보았습니다. 학교 본관과 별관사이에 조그만 온실이 있었고 생물반 학생들이 오는 곳 입니다.

초 여름의 따가운 오후 햇빛이 온실 유리를 강하게 뚫고 들어와 온실 속은 뜨거웠고 습기가 꽉차있어 숨이 막힐 지경 이였습니다. 층층 선반에는 화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키 큰 선인장과 넓은 잎의 열대식물이 무질서하게 얼기 설기 겹쳐져 있었습니다. 아래로 늘어지는 식물 화분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푸른색 물조리개도 놓여 있었습니다. 미술반 정물대 위에서 보는 익숙한 상황하곤 전혀 달랐습니다.

정물대 위의 정물처럼 미리 구도를 설정한 것이 아니어서 무슨 구도로 잡고서 그려야 할지 모르게 복잡하고 산란 했습니다. 그리고 붉은색 화분, 초록색 식물들 노랑색 잎 모든 색갈들이 햇빛에 강렬 했습니다. 그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그렇지만 예외적인 구도도 있다고 하잖니 라며 보이는 대로 순식간에 그렸습니다. 온실 속이 찜통같이 후끈거려서 빨리 그리고 얼른 나가야 했습니다.

갓 부임해 오신 최경한 선생님께서 보시고는 잘 됐다하시며 학원사 공모전에 출품해 보자고 하셨습니다. 작품제목은 온실이라고 하였고 켄트지 4절지 크기에 그린 수채화 였습니다. 이 작품이 뜻밖에도 중등부 최고상을 받은 것 입니다.

덕수궁 대한문을 들어서자 오른편 길다란 회랑이 있는 납작한 고궁이 공모전 전시장 이였습니다. 늦은 가을 전시장 입구의 정원에는 황금색 국화가 만발하였고 그윽한 꽃 향기가 전시장 안에 까지 그윽히 퍼져 있었습니다. 나는 최고상이라고 쓴 황금색 리본이 붙은 나의 그림 앞에 서서 어떻게 최고상이 됐을까 신기해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 뜨겁던 온실 속을 생각해 내고 있을 때 였습니다. 양단 치마저고리를 번쩍거리게 잘 다려 입으신 어머니 두분이 치마폭 부비며 걷는 소리가 요란하게 잰 발걸음으로 내 그림 앞에 까지 오시더니 한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에게 ‘얘, 내가 보여줄게 있다. 이 최고상을 받았다는 그림 좀 봐라. 이게 어디 중3짜리 아이가 그렸다고 할 수 있니 ? 선생이 그려 줬던가 누가 손을 댔지. 우리집 아이가 솔직한 솜씨로 그린 그림이 최고상을 받아야 마땅 한데 말이다. 이렇게 남이 그려주기 때문에 공모전은 언제나 문제거든, 문제 ! 내가 가만 있나 봐라’

뒷편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장본인 학생이 있거나 말거나 실컨 욕설을 퍼 붓고는 오던 쪽으로 향해 다시 씽하니 사라지셨습니다. 너무나 억울 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그림 제가 그린 것 이얘요’ 그 자리에서 즉시 항변하고 싶었지만 나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 때 우리 미술반 전통 중에서 한가지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절대로 남의 작품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철칙 이였습니다. 선생님도 선배도 작품을 보아주며 이렇다 저렇다 지적은 했지만 붓을 빼앗아 그림을 고쳐주는 일은 절대 금기 였습니다.

뽈 세잔느가 ‘쌩뜨 빅뜨아르 산’ 산책길에서 쭈그리고 앉아 스켓치하고 있을때 산책하던 어느 학교 데생선생이 힐끗 보고 지나치다가 그 서투른 솜씨를 보다 못해 ‘형씨 좀 비키쇼, 그림은 그렇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그리는 것이지 않소’ 하고 연필을 빼았아서 개칠해 고쳐 놓고 갔을 때, 그 고쳐준 작자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 안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무말 없이 고친 곳을 박박 지우고 나서 다시 자기식으로 그렸다는 일화를 그 때의 우리는 비록 몰랐었어도 ‘너좀 비켜봐’ 하고 선배가 후배의 그림을 마음대로 손대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단체로 어느 다른 학교 교내전에 구경 갔다가 출품된 그림들이 모두 똑 같아서 모두가 킬킬대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한 뱃심좋은 장난꾸러기 선배가 후배에게 망을 보게 한 후 재빨리 방명록에다 ‘너희들 그림은 모두 너희 선생님 그림 닮았구나 !’ 라고 휘갈겨 써놓고는 모두 뺑소니 쳐 길 한가운데 까지 뛰어 나와서는 그렇게 써놓고 나온 것이 너무나 속 시원하고 좋아서 아스팔트 위를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내가 그린 ‘온실’은 파격적인 산란한 구도에 층층이 놓인 화분들의 붉은색과 열대성 식물과 선인장의 초록색이 강한 햇빛에 반사된 자유분방한 여러 가지 색채로 꽉 찬 것을 순식간에 그려낸 것 뿐 이었습니다. 이 ‘온실’이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순간적인 분위기에 대한 기억은 그 후 그림을 그릴 때 마다 나를 쫓아다니며 나의 작업을 몹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때의 온실’을 ‘그릴 때’처럼 우연히 만들어 지는 효과에 도취되었었던 그 느낌에 의지해 미술대학 졸업후 색채가 요란한 비구상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온실’이 낙선 됐더라면 나는 온실을 그릴 때 갖게 된 우연한 가치관을 지키려 하지 않았을 터이고 좀 더 지속성이 있고 자신감이 있는 가치관을 찾으려고 꾸준히 정진 했었을 것입니다. ‘예술은 결코 마술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일이 아니고 장인의 일 같은 철저함에서 탄생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식을 언젠가 하게 될 것 이었으면 그 의식할 시점을 앞 당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상제도는 의욕을 배가 시키고 용기를 주는 좋은 제도일 수 있지만, 나의 경우 어렸을 때의 수상경험이 나의 장래에 좋은 도움을 주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수채화를 그릴 무렵 화집 속에서 표현주의 화가 노르데의 색채구사를 탐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월간잡지 학원에 크게 소개되는 바람에 매우 유명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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