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후기인상파의 밤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041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1.12.30. 18: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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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2-01

서러운 후기인상파의 밤

S 형 ,

중학교에 진학하자 나는그림을 더 많이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방과후 특활반 활동은 필수적 이였기 때문에 나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려고 미술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일단 미술반원이 되고 나니, 좀 놀기도 해야 겠기에 나가다가 안나가다가를 자유롭게 몇번 했더니, 교실문 앞에서 길목을 지키는 무서운( ?) 상급생에게 잡혀가 기합을 받고 혼이 났습니다. 모든 특활반에서는 한 학년 차 일지라도 상하급생의 위계질서는 엄했고 그때문에 때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까지 했습니다.

추운 한겨울 철만 빼고는 일요일도 여름방학도 없이 거의 의무적으로그림을 그렸습니다. 일단 이렇게 해서 열성적인 미술반원이 되면 칭찬해 주고 위로해 주면서 졸업 때까지 상하급생이 서로 사이 좋게 지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은 각자의 즐거움 이였으나, 10월에 열리는 교내전을 앞두고 학교에서 합숙까지 하면서 준비를 했고, 여름방학땐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숙식 하면서 경내와 산의 경치를 그렸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 열리는 여러 곳 미술대회에 나가서 입상하여 학교 미술반 전통을 빛내곤 했읍니다. 어떤 선배는 가명을 써서 벌써 국전에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이들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미술대학으로 진학하는 미술반원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흔히들 걔가 그림을 그렸어야 했는데 참 아깝다거나 다른 전공을 택한다니 안타까웁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읍니다만 모두들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낼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다른 전공분야를 택해 가야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래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신 것이지요. 고생문이 훤한 밥 빌어먹을 직업이라는 것을 아시고 허락을 못하셨을테니까요.

내가 화가가 되겠다고 집에서의 반대를 뿌리치고 깊이 빠져 들어갔을 때는, 운동선수나 악기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과는 생판 다른 길, 우열로 석차를 정 할 수 없는 길임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막연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동안 그림그려온 열정이 너무나 억울하여 뒤 돌아 설 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 와서 파리미술학교를 또 한번 다닐 때 놀란 것은 이 나라 부모들 역시 자식들의 미술가 지망에 대해 더욱 완고하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미술의 나라 이라지만 그것은 다 지나 간 역사의 이야기이지 화가로의 시작과 진행 중인 현실은 참으로 혼자만의 참담한 어려운 싸움이라는 사실임이 잘 보였습니다.

파리미술학교 학생들은 모두 침울하며 심각했고 18살이 되자마자 생활에서 독립하고자 집에서 뛰쳐나온 청년들 이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린다고 집에서 쫓겨난 청춘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림을 태만하게 안 그려도 등교 때는미술대학 학생답게 스케치 북이나 유화박스를 멋으로라도 꼭 들어야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생각 이었다면 파리미술학교에서는 스케치북을 제대로 든 학생도 드물었고 아무 종이나 구해지는대로 구해서 크로키를 하고 데생을 했습니다. 아무 종이에다든 연습만하면 됐지 무슨 상관이냐냐는 것이지요.

아뜰리에 반 대표가 신문사에 찾아가 윤전기에서 돌리고 남은 롤러에 감겨있는 종이뭉치를 얻어다 통채로 아뜰리에 한구석에 걸어 놓으면 그종이를 아무렇게나 모양없이 네모나게 칼로 잘라서 도화용지로 썼고, 길 에서 나누어 주는 광고짝 종이를 여러번 오가며 얻어가지고 와 그 뒷면에 그리는 학생도 다수 였지요. 물감은 물감회사에서 선전용으로 학교에 보내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기다리고요.

한국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프랑스 미술학교의 이런 실태에 또 한번 놀랬고, 68 학생혁명 후 여서인지 내 소유의 미술재료라하여도 공유물인 것 처럼 내것 네것 구별없이 함께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던 캔파스를 아뜰리에에 놓고 다음 날 와서 보면 그위에다 누가 벌써 그림을 그려버리기도 했습니다. 하기야 피카소가 일생일대의 후회스러웠던 일이 하나 있다면서 새 캔버스를 찾다가 없어서 작품값이 그렇게 비싸질지 모르고 가지고 있던 모딜리아니 작품 위에다 급한 마음에 자기 그림을 그려 버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미술반원들이 모두 돌려가며 읽고 있었던 책은 서머세트 몸의 달과 6펜스 였읍니다. 비문명지인 섬에 가서 새로운 것을 찾아 본 뽈 고갱의 이국적인 면을 그리워하며 각박한 문명세상과 타협을 거절한 그의 일생을 동경 하면서 그 고갱과 같은 화가의 일생을 나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들 말 했습니다.

밤의 해바라기라는 책 제목만으로도 빈센트 반 고호의 일생을 우러러 보았고, 오래도록 그리기 때문에 탁자위 정물이 문들어져 썩어 갔다는 세잔느의 양파며 사과를 본 딴다며 미술반 정물대 위에서 양파와 사과를 일부러 썩어가고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왜들 그랬는지 모르게, 이 세사람의 후기 인상파 화가를 좋아 했으며, 그들의 애환은 감수성 예민한 우리들 마음을 사로잡았고, 사로잡힌 만큼 그들과 더 많이 닮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미술반원일 뿐인 철모르는 나이의 우리는 화가의 일생이 정말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이렇듯 하였으니, 고호가 두껍게 칠한 코발트 밤하늘에 뿌려놓은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후기인상파의 밤’은 바로 이렇게 별들이 반짝이는 밤, 그러나 그 밤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별들만 있는 밤이였구나를 생각했으면서도 화가가 된다는 것은 그와같은 절망적인 밤을 후기인상파들과 함께 지새워 보기 위해 자진해서 떠나는 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은 소년들의 공상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던 공상 이였습니다.

그때, 그래서, 실제로, 미술대학에 들어간 k선배는 수원 근처로 후기인상파들 처럼 사생 나갔다가 일사병으로 넘어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영양부족인 몸에다 땡볕아래에서 악만남아 가지고 그림을 그리더니만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 k선배가 죽은 후 며칠동안 미술반 구석진 곳에 시선을 파묻고 겉으로 울고 속으로 울고 몹씨 울었습니다.

미술혁명이랄수 있는 인상주의 운동에 가담한 모험적인 젊은 화가들은 아카데미 전통에 그래도 반항할 줄 아는 유식한 청년들 이었던데 비하면 세잔느는 미술학교 입학을 시도했다가 낙방하고 고갱 과 고호는 창작이어야한다는 그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한가지 열정만으로 무작정 덤벼들었던 무지하고 나이까지 든 어른들 이였습니다.

법과대학을 중퇴하고 미술학교를 택해 보았던 세잔느나, 38살까지도 증권회사 중개인이었다가 화가가 되겠다고 17년동안 그림을 그린 고갱이나, 목사가 되고자했다가 딱 10년간의 화가로서의 생애를 마감한 고호나, 셋은 모두 다 멋 모르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적이었던 뚝심은, 누군가가 알아줄줄 기대했거나 말거나, 현대미술이 향하게 될 세가지 방향을 각자 한 방향씩 만들어 제시 했습니다.

셋은 고집속에서 똑 같이, 인상주의 화풍은 순간적이고 찰라적인 빛의 작용만을 쫓다보니 모두 추구하다가 만 미완성 상태의 작품으로 끝나있다고 그것을 의심 했었을 것 입니다.
인상파화가들이 집단적인 운동으로 치우친 그 한방향의 그림은 사진으로 치면 스넵사진이어서, 한 순간의 즐거움이랄까 덧 없는 기쁨만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보게 된다음, 그들 셋은 작품다운 작품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그려려면 화풍이 ‘더 단단하고 굳건한 작품’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 추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단하고 굳건함’은 바로 ‘개성의 발현’을 말하는 것일진데 이런 창작태도는 개성이 중요시되는 예술세계로 향하도록 후세의 작가들을 인도하게 된 것 입니다.

옛 인습(화풍)을 죽이는 새로운 인습(화풍)이 나타나고 그 새로운 인습은 다시금 옛 인습(기존 화풍만을 지키려 하는)이 되버리기를 반복하고 재반복하는 사실을 안 경험 속에서도 후기인상주의 화가라고 불리워지게 될 이 세 화가가 추구하는 개성적인 작업들을 이해하지를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야유했거나 미친짓으로 매도하여 관심밖의 일로 밀어버렸으니 그들은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일생에 겨우 한번, 동정심이 많은 까미으 피사로의 도움으로 죽기전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세잔느, 타이티 섬으로부터의 그림을 가지고 와서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 때마다( 겨우 두번이지만) 비문명적이라고 야유를 받고 ‘파리에 다시는 발을 디디러 오지 않겠다’ 선언하고 스스로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부른 타이티섬으로 아주 돌아간 고갱, 파리 교외 하숙집 초라한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삼키며 이 식당 안에서라도 좋으니 제발 한번만이라도 전시를 열어 내 그림을 벽에 걸어봤으면 원 했던 불쌍한 반 고호.

죽어서야 얻는 영광을 그들은 저승에서 알고 있을까요 ?

이 세 사람의 운명은 베르디가 ‘운명의 힘’ 에서 강조한 것 처럼 그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재확인 시킬뿐이며 사후의 영광은 한낱 헛된 일이노라 깨닭게 할 뿐 입니다.

정말 , 이제 와서 돌이켜 보아도 후기인상파의 밤은 몸부림치도록 서럽고 서럽던 밤 이였지 않습니까 ?

작성일 :200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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