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 동창생 윤건철의 죽음 (4)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423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4.27. 16: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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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5-13

S형,

윤건철은 뉴욕으로 갔습니다.

파리에서 나를 만나 보고 귀국한 윤건철은 얼마 후 작가로서 마지막 찬스를 잡기 위해서 홀로 미국으로 간 것입니다.

유럽을 돌아 본 윤건철은 한국에 더 있어 봐야 똑 같은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이라고 판단하고 미국에서 작가 생활의 새로운 장(章)을 열어 훌륭한 경력을 만들어 귀국할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유럽을 먼저 온 것은 자신의 그런 꿈을 유럽에서 펼쳐 볼 수 있는지 진단해 보려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 소통문제도 있는데다 무언지 꽉 막힌 것 같은 보수적인 유럽 보다는 다민족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래도 숨통이 좀 터져 있을 것 같은 미국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 곳은 당연히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지인 뉴욕이었을 것입니다. (끝)

뉴욕에 도착한 윤건철은 어느 판화공방에 등록을 하고, 판화를 연구하면서 겸손히 도약의 기회를 찾으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이미 말이 아니게 나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윤건철은 창작활동을 활기있게 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 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면 건강도 회복되고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건철은 타향살이를 시작하자 마자 쓰러지고 말았고 급기야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취장암 최말기환자로 진단을 내린 미국의사는 치료하기엔 너무나 늦었으니 어서 귀국해서 가족에게 돌아 가라고 했습니다. 윤건철은 그제서야 자기가 최후의 상태라는 것을 받아드리고, 멀고 먼 왔던 길을 빈손으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는 기막힌 상황과 얄궂은 운명을 한탄하며 혼자서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윤건철은 너무 늦게 외국유학에 나선 것입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자기를 제로로 되 돌려놓고 낯선 타국에서 새 출발 한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였습니다.

사막 같은 곳에 떨어졌다면 태양과 별자리를 보면서 방향을 잡아 사막을 탈출해 볼 수도 있겠지만, 빌딩숲 사이로 난 도로가 사방팔방으로 시원히 뚫려 있어도 사막보다도 더 황량한 뉴욕에서 어디로 가야 희망의 탈출구를 찾을지는 정말 막연 했을 것입니다.

만하탄은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야망과 꿈의 거리지만 빈손으로 갓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위압적이고 거대한 괴물일 것입니다. 윤건철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시장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미술가들을 위한 낙원은 아닙니다.

내일 아침 담장이 덩굴에 붙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져 버린 것을 보면 마지막 잎새뒤를 따라 죽을 것이라고 체념한 유행성 폐렴을 앓고 있는 화가지망생 아가씨 존지가 밤새도록 부는 세찬 바람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견딘 마지막 잎새를 아침에 일어나 보고 소생한다는 오헨리의 단편.

오헨리는 아무런 걸작도 남기지 못하는 재능이 부족한 늙은 화가 베어먼이 그냥 덧없이 죽지 않도록 그 ≪ 마지막 잎새 ≫를 비바람 몰아치는 밤새에 담벼락에 올라가그리게 한 후 폐렴으로 죽게 했습니다. 그 곳이 가난뱅이 화가마을이었던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였습니다.

윤건철이 집에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R이 불야 불야 병문안 갔습니다. 병실 창문 옆에 앉은 윤건철의 모습은 역광 속에서 허상인 것처럼 희미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날아 갈 것 같이 맥없고 하염없는 실루엣은 임종의 시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해서 앙상한 윤건철은 R이 닦아가자 물끄러미 바라 보는 듯 하더니 ≪ 나 이제 곧 나을꺼야 ≫라고 들릴락 말락하게 말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운명의 힘은 그의 희망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에게 단 며칠도 더 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의 삶을 꿈꾸며 여기 저기 헤매던 한국의 서양화가 한 사람이 모진 생존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삶에 지치고 병들어서 슬며시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죽음 속에서 나의 죽음을 봅니다. 나도 만약에 한국에서 작가활동을 계속 했었더라면 그와 똑 같은 비운의 행로를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파리에 왔을 때 ≪ 일찍 잘 빠져 나왔어 ≫라고 말한 것처럼, 그 곳을 일찍 탈출할 수 있었기에 나의 수명이 연장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윤건철의 행로를 밟을 첫번째 불길한 징조는 화단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벌써 나타났었습니다.

S미대 졸업식 날 문리대 운동장에서 있었던 졸업식을 마치고 길 건너 미술대학 교정으로 돌아왔을 때, 사각모에 검은 가운을 펄럭이며 사진을 찍던 동기생들이 나를 보자 이구동성으로 C교수가 나를 급히 찾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나를 찾는다던 C교수를 그날 못 만나고 말았지만, 왜 C교수가 나를 찾는지는 언뜻 뇌리를 스쳐가는 짐작이 있었습니다.

재학 중 나는 불행히도 어떤 교수의 애총을 받는 제자도 못 되었지만 4년간 모든 교수들로부터 실기성적에서 A학점을 받은 유일한 학생 이었습니다. 그러나 졸업 때 어인 일인지 나는 차석으로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학점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학창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는 차석이면 어떻고 말석이면 어떻냐, 그게 내가 장차 화가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드란말이냐면서 웃었습니다.

졸업식 직후 C교수가 나를 급히 찾는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차석으로 졸업한 사실 조차 기억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만 C교수가 스스로 실수를 범하느라고 나를 찾는 바람에 혹시 졸업석차순위를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영원히 가지게 됐습니다.

그날 다른 동기생들의 말에 의하면 C교수가 나를 찾는 이유는 어느 시골 중학교에서 우수한 졸업생을 미술교사로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나를 특별히 그 학교 미술교사로 추천해서 보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졸업하자 마자 고맙게 미술교사로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재학 중 C교수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나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C교수의 그 같은 배려를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차석과 수석을 뒤 바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을 감추는 연극을 여러학생들앞에서 한판 멋지게 벌린 것이라고 믿게됐습니다.

C 교수가 그러한 배려로 나를 찾았다면 끝까지 나를 찾아 냈어야 했는데 동기생들에게 말로만 생색을 내고는 어디론지 학교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며칠후 C 교수와 학교복도에서 우연히 정면으로 마주쳤으나 거기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었으므로 나의 그 의구심을 풀지 못했습니다. 어색해 하는 C교수의 얼굴에서 나는 무언가 잘 넘겼다는 안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술교사를 구하는 그런 학교가 있어서 우리 동기생 중에 그 학교 미술교사가 됐다는 얘기도 그 후에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이가 될 때 까지 나는 이러한 추측과 의구심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번째 불길한 징조는 나의 패배의식을 부추기며 줄곧 나를 괴롭혀 갔습니다.

내가 윤건철의 죽음을 두고두고 애석해 하는 이유는 그가 그림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화가로서의 명쾌한 자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별로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살아서 빛을 못보고 고생만 하고 죽더라도 작품이 남으면 그가 살았을 때 이를 악물고 한 일들이 뒤늦게 나마 인정되고 평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작가들은 죽은후 인정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작가들이 세상에 왔다가 영예로운 화가의 삶을 다 채우고 세상을 하직하면서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은 불출세의 화가의 위업이 사후에 인정되고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작품이 시대를 앞섰던 탓으로 사람들이 무지해서 몰라준 것입니다. 그리고도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평가받을 걸작품이 없기 때문에 죽은 후에 곧 잊혀지는 화가들도 허다합니다. 동시대 세상 사람들이 떠 받드는 잘 나가는 화가도 사후에 그의 작품이 보잘 것 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 되어버리는 경우 역시 허다합니다.

그러나 윤건철은 어떻든 평생 다소곳이 자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윤건철이 냉혹한 이기심과 악착같은 창작열로 고독과 싸울 수 있었더라면 그래도 화가로서의 행운을 누렸을 텐데, 인연이 없던 사회와 화단의 부조리에 시달리고 헛 신경을 쓰는 동안 행운은 그를 매번 비켜갔던 것입니다.

동기동창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유작전을 열어 주고자 했으나 그럴만한 작품이 집에 없었습니다. 동창들의 그룹전에 미완성 작품을 포함한 몇 점을 추려서 출품해 그의 일주기를 기념했다고 했습니다.

윤건철의 죽음에 대해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찾아내려고 틈틈이 인터넷으로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윤건철의 이야기를 끝내는 날 우연히 대한매일 통합검색엔진에 들어가서 윤건철의 유작 한점을 찾아내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국방부가 보관하고 있는 전쟁기록화였습니다. 아마도 미국에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작품은 1985년에 그린 ≪ 충남서산간첩선격침 ≫ 장면이었습니다. 국립홍보원 국방화보에 실려 있는 이작품은 다음 인터넷주소에 실려 있었습니다.

http://www.dapis.go.kr/pictorial/mac/s51_1.html

또 한편의 기록화는 사진으로는 떠오르지 않고 국방부 자료실 기록으로만 알 수 있는1984년에 제작한 ≪ 통영상륙작전 ≫ 인데 ≪ 이 호국화를 윤건철화백이 당시의 처절한 백병전을 생생하게 묘사 했다≫라는 주를 달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의 친구이며 동료 화가였고, 어쩌면 또 하나의 나였을 지도 모르는 윤건철을 <나의 그림이야기>에 남기면서 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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