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 동창생 윤건철의 죽음 (2)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2867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3.26. 16: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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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4-17

S형,

윤건철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80년대 중반 그 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리에 왔을 때 였습니다. 단체관광으로 유럽을 여행하는 중 파리엔 이틀 밤 묵는 짧은 일정 이었습니다.

연락이 없이 파리에 온 그가 밤 늦게 호텔에서 방금 도착했다고 전화로 알려 왔을 때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즉시 그의 호텔로 찾아 갔습니다. 그는 미대동창인 조각가 K와 룸메이트로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보자 ≪ 야 ! 내가 드디어 파리에 와 본다 ≫ 고 말하더니 비행기에서 같이 마실려고 샀다는 위스키 병을 따면서 만난 회포를 당장 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하나 그는 잘 마시던 술을 드는 시늉만 어색하게 했는데 동행하고 있는 K는 그렇게도 하지 말라는 주의를 연상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보자 옛날 생각에 빠져든 나머지 마시고 얘기하고, 취하고 얘기하고 싶었고, 나도 같은 마음인지라 마시지 않고는 참기 어려운 심경 이였습니다.

우리는 학교때 땅거미가 질 때면 아뜰리에에서 내려와 괜히 교정 풀밭에 앉아서 컴컴해 지도록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기도 하였고, 아니면 대학로 뒷골목 주막으로 가서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 키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그와 나는 단둘이서 하루종일 술을 마신적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부당한 미협이사장 선거문제로 울화통이 터졌던 일로 마음을 좀 추스려 보기 위해 만났 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만나서 할일없이 청진동에 있는 어느 조그만 대포집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해서 얘기에 얘기를 보태다가 그날 오후를 다 넘기고 밤중까지 내리 마셨습니다.

잔디밭이거나 주막집이거나 그 많은 시간을 허비 하면서 이야기 한 것은 우리들 그림 그리는 자세나 창작문제로 인한 고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신세 타령이나 화단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이런 퇴폐적인 풍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화단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고 활동해 보려다 실망한 순진한 신진화가들 사이에 은연중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림을 잘 그려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아름다운 꿈을 품었을 때와 실제로 생계가 어려운 비참한 화가가 마침내 되고 말았을 때의 상황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아무리 대학까지 다니며 서구식 미술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예부터 문인화가의 전통이 잠재해 있는 한국풍토에서는 전업화가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이 세속에 초연해야 할 화가에게 떳떳치 못하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렇드라도 비록 활개 칠 수 있는 우리 터전이 아니냐고 스스로 우겼더라도 그림매매란 거의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유유히 그림만 그린다는 것은 먹을 것이 넉넉히 있어서 생활을 영위할 걱정이 없는 유복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며,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화가가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것은 굶어 죽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그래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못 살겠다고 화단에 데뷔한 화가들에게 또 하나의 험난한 난관은 끼리끼리 파벌을 형성하여 파워를 행사하는 화단의 풍토였습니다. 어떤 그룹에 소속되지 않고서는 화가로서 입신하기 어려운 생존경쟁의 법칙이 화단에도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화실에 틀어 박혀 그림에 열중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에 시달려야 하는 불행한 데뷔땅(화단의 초보자)들 이었습니다. 먹을 것은 딴 데서 찾아 오든가 집안이 원래 경제적으로 유족하여 눈치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았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조건을 지녔드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독한 화가의 삶을 끝까지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또 남아있었습니다.

그 무렵, 국전이나 재야 공모전에서 상을 받든가 전위작가군에 끼어 들기 위해서 해외에서 뉴스로 전해오는 아리숭한 화풍을 흉내내는 것 등등은 모두가 우리에게는 흔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파리에서 만나 호텔방에 털석 주저 앉은 우리 세 사람의 미술대학 동창은 할 말이 태산같이 많았는데도 윤건철이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피 하느라고 침울 해져서 할 말을 잊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 입을 연 윤건철은 나를 두고 K를 향하여 ≪ 얘는 빨리, 일찍 잘도 빠져 나왔어 ! ≫ 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하면서 예의 허스키 헛기침을 했습니다.

과묵한 K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희미한 전기불 때문에 검은 피부가 더 검게 보인 지치고 고단한 모습을 한 윤건철은 이번에는 나를 향해서 서울에서는 살기가 힘들고 그림 그리기도 몹씨 힘들다는 용기를 잃은 그 답지 않은 하소연을 토했습니다.

그는 지금 강릉에 있는 어느 대학에 강사로 나가기 때문에 일주일에 며칠은 강릉에 가 있어야 하며,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마음을 집중할 수 없어서 그림이 안되어 더욱 힘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전임자리를 하나 얻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S여대 전임자리를 맡기로 거의 확정이 되었는데 누군가가 끼어 들어 그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윤건철은 그 빼앗김을 얼마나 억울해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K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윤건철도 대학 졸업 때 나와 같은 생각으로 전업 작가가 될 결심을 하고 화단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는 우리 학교보다 H미대에 더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 첫 화단활동을 H대 출신들이 중심이 된 그룹에서 활발히 했습니다.

내가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파리로 떠나기 직전 덕수궁 옆의 어느 전시실에서 열린 그 그룹전에서 였습니다. 그룹전 출품 작가들은 전위적인 화풍을 저마다 선 보이고 있었는데, 윤건철도 그때 뉴스로 들어온 극사실적인 화풍을 받아들여 매듭진 굵은 밧줄이 팽팽히 흰 화면 밖으로 뻗쳐 나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새작품을 출품했습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전혀 그답지 않은 작품이라 의아해하며 놀라워 했습니다.

당시의 우리나라의 화단에서 국전을 철저히 외면하고 전위적인 작품활동을 하는 화가들의 활로는 파리 청년작가 비에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되든가 상 파올로 비엔날레 같은 국제전에 출품작가로 선정되는 길뿐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국제전에 출품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파워가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국제전 출품작가 선정권은 대한미술가협회 서양화 분과위원회가 전권을 가졌습니다.

원래 대한미협은 미술가들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작가들간의 친목단체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국제전 국가대표작가 선발권이 미협에 쥐어지자 그 때부터 화단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일어났습니다. 화단에 몹쓸 마키아벨리즘이 횡행하게 된 것입니다. 작가경력을 따지는 세속적인 평가기준에서 국전에서의 대통령상 수상 못지 않게 세계적인 국제전 출품작가였다는 경력은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무슨 사단이라고 까지 명명된 전투적인 한 무리가 미협 이사장 선거에서 연속적으로 어거지 승리를 거둠으로써 우리나라 화단의 심각한 병폐는 오래도록 고쳐지지 않은 채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화단사에서 언젠가 철저한 비판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병폐란 자기 패거리 이외의 화가는 철저히 무시해 버리고, 한국의 현대미술은 오직 자기들의 전유물인양 내세우면서 국제전 출품을 독차지하는 행패를 부린 것입니다.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가 다른 그룹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 본들 국제전에 나갈 기회를 얻기에는 턱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병폐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제전 출품자로 선정되어 파리에 온 어느 새파랗게 젊은 작가는 붕괴된 성수대교의 콩크리트 잔해를 비행기로 실어와 작품이라고 전시했습니다. 이런 작품을 무조건 높이 평론해준 수상쩍고 편파적인 프랑스 평론가들을 하느님 모시듯 하면서 창작행위보다는 화단정치의 요령만을 익혀서 행세하는 무리들이 한국화단에 있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당시의 혈기찬 젊은 작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런 풍토에서 화가로 버텨 나간다는 것은 것은 참으로 어렵고 억울하기만 한 일이었습니다. 눈동자 빛나는 젊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화단 풍토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녀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죽을 맛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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