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 동창생 윤건철의 죽음 (1)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157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3.22. 09: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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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4-4

S형,

S 중학교 미술교사로 2년간 근무한 시절에 출퇴근하며 걷던 배추밭 사이 오솔길은 나에게 행복을 주었던 길이었습니다.

집과 학교사이의 넓은 아스팔트 버스길을 저만치 놔 두고 나란히 난 가느다란 채소밭 사이 흙길을 걸어서 등교하려면 40분쯤 걸렸습니다.

길 양편에 펼쳐진 넓은 밭에는 배추와 무가 자라고, 겨울엔 눈이 쌓여 눈부신 설원이 되었습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6.25동란 때 외삼촌댁으로 피란을 갔던 때 논밭에서 농사를 거들던 힘겨운 시절을 회상해 내기도 했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 중간쯤에는 조그만 벽돌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공장을 지날 때면 빨간 벽돌을 가루로 빻아 고추가루를 만들던 동네 여자아이들의 소꼽놀이가 아득하게 눈에 어른 거렸습니다.

또 온갖 싱싱한 야채를 파는 지붕 있는 청과시장과 그곳 조그만 마을도 통과 했습니다. 장성할 때까지 도심에만 살다가 학교에 취직이 되면서 학교에 가까운 성수동 변두리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일정한 수입이 없어 늘 불안하던 전업작가생활을 몇 년간 하다가 이젠 중학교 미술선생이 되어 박봉이지만 어엿한 직업다운 직업을 얻은 것입니다. 하루종일 그림과 씨름하는 화가이기를 단념하니 마음고생에서 오는 고통도 사라졌습니다. 높고 넓은 하늘과 흙 냄새 물씬 나는 넓은 들판을 보면서 나의 젊은 가슴은 일시에 탁 트이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매우 낭만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새로 부임한 미술선생과 음악선생에게 ≪ 우리 학교 학생들은 2차에도 떨어지고 3차 시험으로 들어온 변두리의 가난한 집 학생들이라서 다른 무엇 보다고 정서적인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 ≫ 면서, ≪ 영어나 수학 선생이 결근하는 것 보다 당신들 미술과 음악 선생이 결근한다면 그것을 더 가슴아파 하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 간곡한 말씀에 감동되었던 나는 그 학교의 미술선생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그렇기에 나는 매일 그토록 유유히 오솔길을 걸으며 출퇴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날씨가 좋은 봄 어느날 퇴근길 내가 지나치는 마을의 어린이들이 길거리에 나와 길을 가로막고 아우성을 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나는 길가운데를 점령하고 노는 아이들을 피해 여염집 처마 밑으로 피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린 창문속에서 밖을 내다보는 어느 여인이 낮 익은 목소리로 ≪ 어머나 ! 누군가 했는데… ≫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문 안의 여인은 애기를 가슴에 앉고 있었는데, 미술대학을 같이 다니던 반가운 동창생 이었습니다.

애기를 안고 있는 엄마도 부끄러웠을 테지만 웬일인지 나도 손 가방을 든 촌스러운 선생모습이 창피스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우리 서로는 배추밭 가운데에 있는 이런 외딴 마을동네에서 어떻게 이렇게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듯이 상대방의 당황한 표정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가운 동창은 이내 표정을 감추고 쌀쌀맞게 나를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 우리 동창들은 다들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벌써 졸업한지 4년도 넘었는데 신문에서 이렇다 하고 떠드는 화가가 하나도 없으니… ≫ 그는 안고 있던 아이를 추스려 올리면서 ≪ 우리 여자들은 이렇다 하더라도 남자들은 다 무얼하고 있는 거지요 ? ≫ 하고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습니다.

나도 스스로를 좀 한심하다고 여기고 있는 중인데 이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여기 사세요 ? 이 길은 내가 매일 학교로 출퇴근 하는 길인데… ≫하고는 말을 더 보태지도 못하고 그 동네를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그 동창은 학교다닐 때 매우 활동적인 학생 이었습니다. 공모전에 출품하여 상도 받는, 활발히 작품활동을 해서 서양화과에서는 이름을 꽤 날리던 예비 여류화가로서의 재원 이었습니다.

나는 그 다음날 부터 이 행복한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다녔습니다.

우이동 버스종점 근처 넓은 잔디밭에서 S대학 서양화과 총 동창회 모임이 있었을 때 조금 늦게 온 윤건철은 나를 보더니 놀란 눈을하고 나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 와서 일언반구도 없이 대짜고짜 주먹으로 힘껏 나의 가슴을 후려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 너 언제 온거야 ? 아주 온거니 ? 자식 왔으면 왔다고 할 것이지 ≫ 하고는, 자기 행동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 이따 보자 ≫하고 되돌아서 앉았던 반대편 자리로 되돌아 갔습니다.

나는 그 전날 파리에서 8년 만에 엄청나게 커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그 다음날 동창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았고, 전람회를 하러 왔으니까 총동창회에 나가서 선후배 동학들을 한자리에서 만나 인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서 시차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모임에 허겁지겁 참석했던 것입니다.

윤건철은 8년만에 의외의 장소에 나타난 나를 보자 저것이 유령인지 아닌지 의심이 나서 주먹으로 쳐서 아파하는 반응을 본 다음에야 그 의심을 풀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전날 과음을 했더라면 오늘 아침 나를 보았을 때 유령일 것이란 의심이 더욱 컸었을 것입니다. 이 순간적인 장면을 눈 여겨 본 선후배들이 있었다면 둘 사이에 무슨 다툴 일이라도 있었나보다 했을 것입니다.

윤건철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라하면 캔버스들이 빼곡히 들어찬 학교 아뜰리에에 서서 중키에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붓을 들고 있는 시원한 쾌남아로 그려 놓겠습니다.

그의 살구씨 두 눈은 얼굴 양쪽으로 보통사람보다 좀 더 벌려서 그려야하고, 송충이 같은 까만 눈섶에 속 눈섶까지 좀 길게 그려 넣겠습니다. 묵직하게 편편한 코와 두툼한 붉은 입술도 그려넣어야 하겠고 턱은 조금 길게 그리고, 피부색은 좀 짙게 칠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약간 허스키인 바리톤으로 신명나게 부르는 그의 노래를 회상해 내겠습니다.

그가 이젤과 화구를 짊어지고 들판으로 스케치 나가는 것을 누가 보았다면 아마도 뽈 고갱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인상파 화가의 실루엣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윤건철을 비롯한 우리는 모두 자유스러운 대학생활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생전처음의 남녀공학의 캠퍼스 분위기 때문인지 의젓해 보일려고들 애썼습니다. 그러나 곧 화가 지망생들답게 학창생활을 재밋게하는데도 예술가적 기질을 곧잘 발휘했습니다.

모두들 막연하나마 더 창의적인 학교의 분위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개성이 아주 강한 미술학도이고 싶었고, 심지어 자기들 성질을 과시하느라 괴짜 행동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기발한 친구는 미술대학에 들어 오기 전부터 자기가 원래 괴짜였던 것처럼 과시하려 했는데, 그렇지 않았을 윤건철도 그런 축에 낄려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괴짜행동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고 대개는 유치한 일이어서 기껏해야 남이 잘 안 부르는 노래를 부른다든가, 유행하는 첨단적인 괴상한 춤으로 괴짜 됨됨이를 내 세우려 하던가 , 막걸리를 마시는 술자리에서 주량순위에서 매번 우위를 차지해 보려고 과음을 마다하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궤도를 벗어난 듯한 우리의 행동은 우수꽝스러울 수도 있었으나 우리 세대에선 스트레스를 간혹 그렇게 풀면서 창작활동의 활력을 비축하는 중요한 시간보내기였을 뿐입니다.

윤건철은 노래도 춤도 잘 추었지만 주량이 남보다 세었습니다. 원래 그가 술을 잘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하건데 그는 모범생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당시는 교복을 꼭 입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입을 옷들이 마땅치 않아서 남학생들은 일년내내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윤건철은 술 마시는 좌석에서 친구들을 기분 좋게 하고 싶을 때는 ≪ 우리 고등학교에서 이 들어오기 어려운 S대학에 들어 온 것은 전교를 통틀어 나 혼자뿐이어서 여간 자랑스럽지 않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나 교복을 입고 잰단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다닌 학교는 손기정선수가 나온 유명한 학교란 말이다. 나도 손기정선수가 다닌 학교 출신이라니까. 여기, 손기정 모르는 사람은 손 들어 봐≫ 했습니다. 그는 양정고등학교 출신이였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을 적에는 늘 심각한 것 같는데, 어울리면 즉시 명랑해지고 주윗 친구들을 잘 웃길려고 했고 웃기고 나서는 그것이 실 없는 짓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보이락 말락하게 미묘한 매력을 주는 웃음과 허스키 헛 기침으로 슬며시 감추는 그런 순진한 친구였습니다.

윤건철의 고등학교 미술선생님 L은 아주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윤건철이 지도받은 그림도 사실적인 그림이었습니다. 그의 선생님이 속해있는 M회는 한국화단에서 제일 고리타분한 화풍을 지녔다고 신진세력 쪽에서 평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선생님에 대해서는 얘기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그 선생님의 훌륭한 작품제작태도에 대해서 나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해준적도 있습니다.

대학 4학년 졸업반에 올라 가니까 서양화과의 거의 모든 학생들은 어느 틈엔가 모두 추상화로 돌변하여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나와 몇몇은 그래도 구상세계를 고수했는데, 윤건철도 그 선생님 영향때문인지 구상화를 고집하면서 졸업때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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