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의 모자이크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3778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3.14. 22: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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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2-13

S형,

미술을 얘기 하려면 희랍 신화도 공부해야 하지만 종교도 알아야 합니다.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회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에서도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입니다.

파리에 오자마자 나는 한시 바삐 이탈리아에 가서 르네상스 미술을 보아야 겠다고 벼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몇년 뒤에나 이루어 졌습니다.

늦어진 이유중의 하나는 프랑스 주재 우리 한국대사관에서 나의 여권에 다른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경유지 추가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이 자유스러워 진 것은 최근의 일 입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해외 여행에는 많은 제한이 따랐습니다. 무슨 직권인지 모르겠으나 대사관 영사는 프랑스에 왔으면 됐지 또 다른 나라엔 무엇 때문에 가려고하느냐는 것이 거절하는 이유 였습니다.

미술 학교 첫해에 고구려 수렵도를 그려본 프레스코 수업후, 그 다음에는 모자이크 수업을 받았습니다. 뤼보나빠르뜨 길에서 학교로 들어가면서 도서관 앞 너른 교정에 면해있는 따삐스리 아뜰리에 밑층에 있는 모자이크 아뜰리에는 깊숙한 터널식 반 지하실로 고대 로마의 지하묘지 카타콤베를 연상케 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프레스코 아뜰리에에서와 같이 중노동으로 수업이 시작 됐습니다. 일단 1 미터 평방되는 나무궤짝을 목판처럼 짜고 거기에 콘크리트 반죽을 부어서 어느 정도 두께의 바닥을 만들어 굳혀 모자이크 조각판을 만들었습니다.

작업장엔 모자이크 재료로 깨졌거나 금이 간 도기 그릇, 도자기 접시와 칠보 유리제품 용기등이 마직푸대 속에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는데 이것들을 꺼내어 모래바닥에 놓고 나무 망치와 끌을 사용하여 조그맣게 재단을 하거나 잔잔한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은 위험하기 때문에 눈을 보호하는 안경을 쓰고 장갑을 끼고 했습니다.

미리 준비한 에스키스에 기초해서 깨어 논 색색의 조각들을 꼼꼼히 석회로 붙혀서 모자이크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대단히 많이 걸렸고 작업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만 조금씩 형상이 잡혀 갈때는 큰 성취감은 느꼈습니다. 다른 작업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쾌감이 았었습니다.

모자이크 교수는 수업중 학생들이 하는 일이 답답할 때마다 라벤나(Ravenna)에 가서 비잔틴 모자이크의 진수를 보고 와야 겠다고 자주 얘기 했습니다.

나는1960년도 초,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신축할 때 파사드(정면 벽)에 모자이크 장식을 하는 일에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술대학 선배들이 아르바이트로 그 일을 할때 잠시 거들어 준 것 입니다. 그것은 촘촘히 붙여야하는 본격적인 모자이크 작업은 아니고, 깨트린 접시나 부정형의 도기용기 조각을 벽에 붙여서 시멘트 벽 여백과 함께 추상적인 구성을 이루는 작업 이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처음 여행할 때 그 동안이나마 프랑스에서 살면서 서양의 생활에 익숙해 졌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도 프랑스와 또 다른 습관때문에 어리 둥절한 순간이 매번 생겼습니다. 이렇게 어리벙벙하게 되는 일은 비단 이탈리아에서 뿐만이 아니고 유럽 어느 나라에 가든지 발생했습니다. 이마를 맞대고 있는 인접국들 인데도 각 나라마다 풍습과 관행에 생판 다른 점이 많고 잘 이해하기 위한 언어소통문제 때문에 당혹스러웠습니다.

낭만적으로 앞뒤로 출렁거리는 씨트로엥 2 V를 타고 몽불랑 터넬을 통과해서 미라노를 거쳐 파도바로 가서 서양미술의 아버지인 지오또의 놀라운 프레스코를 보고 베네치아를 거쳐 교수가 말하던 비잔틴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 라벤나로 갔습니다.

유명한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Sant’Apollinare Nuovo)’에 찾아 갔을때 성당안은 너무 어둠 침침하여 거기의 모자이크를 잘 볼 수 가 없었읍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훵하니 넓은 동랑만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서 인근 카페에 가서 우선 엑스프레소를 한잔 시켜놓고 무조건 프랑스말로 저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를 보아야 겠는데 도대체 어두워서 잘 안보이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웨이터는 거침없이 이탈리아 말로 대답하는데 무슨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는 중에서도 성당안에 들어가면 벽 왼쪽에 동전 넣는 통이 있으니 동전을 넣어 보라는 뜻을 겨우 알아 차렸습니다.

이탈리아사람들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는 수다 쟁이 들인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 짓을 보고 그 뜻을 짐작했습니다. ‘그만 말하시오’ 라고 아무리 해도 계속 떠드는 사람들이 이탈리아 사람들 입니다. 말문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손을 꽉 붙잡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손을 휘두르며 말하는 국민 이였습니다.

다시 성당안에 들어가니 문옆에 과연 통이 있고 전화기 처럼의 구멍에 얼마짜리의 동전을 넣으니 찰가닥 걸리는 소리가 나면서 통속으로 동전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성당안은 벼란간 환하게 불이 켜졌고 아프스(apse감실)의 모자이크벽화에도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면서 휘향 찬란해 졌습니다. 한 3분 지나니 켜졌던 불이 꺼지면서 다시 캄캄해 졌습니다.

그 제야 조명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해서 동전을 듬뿍 넣고 찬찬히 모자이크를 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당 속이 이처럼 캄캄한 것은 건축양식이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식은 기독교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최초의 성당 양식 입니다.

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으면서 당장 교회당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신전과 같은 양식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교도의 건물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시장이나 공공재판소 등 사람들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공회당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실리카(basilica) 건물양식을 교회당의 표준 모델로 삼았습니다. 이 건축양식은 신도들이 모이는 커다란 장방형의 동랑(胴廊 nave 船이라는 뜻 )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제단(主祭檀)이면서 성가대석(choir)인 반원형의 감실(龕室 혹은 後陣apse)을 앞에 둡니다. 동랑의 양옆에는 측랑(側廊side-aisle 날개라는 뜻)이 붙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부터 ‘바실리카’라는 말은 이런 형태의 교회당을 일컫는 명칭이 됐습니다.

그러나 천정이 평면인 이 건축 양식은 벽에 창문이 없기 때문에 내부는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까지는 창문을 만드는 건축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당안의 모자이크를 잘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세기 초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세운 사끄레꾀르 성당(Basilique du Sacre-Cœur) 도 모자이크 감실벽화가 있는 바실리카 양식 건물이지만 전통적인 양식을 일부 변경해서 돔을 만들고 벽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해 놓아 내부가 비잔틴 바실리카와 같이 어둡지는 않습니다.

얘기가 약간 빗 나갈지 모르지만 성당 건축 양식에는 대표적인 것으로 두가지가 더 있습니다. 프랑스 어디든 시골 마을에 있는 중세 로마네스크 성당과 파리 노트르담 사원이 대표하는 고딕 성당입니다.

중세에 와서 둥근 아아치를 만드는 건축술이 알려져서 로마케스크 양식이 발전하게 됩니다. 육중해 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둥근 천정을 지탱하느라 벽을 두껍게하여 튼튼 하게만 했지 아직도 창문을 크게 뚫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성당안은 바실리카 양식에 비하면 훨씬 밝아 졌습니다.

그후 12세기에 프랑스에서 첨형 아아치 쌓는 법이 개발되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천정을 높히면서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을 생략하고 스텐인드 글라스 창문을 내는 놀랍도록 환한 고딕 성당이 출현했습니다. 신도들이 고딕 성당에 들어와서 놀란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서 들어온 화려한 형형색색의 빛이 아롱진 드높은 공간 이었습니다. 그것을 처음 보는 그들에게는 천상의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신비했을 것 입니다.

6세기 말에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화(敎化)하기 위해서는 형상(形像)이 필요하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시점부터 미술과 종교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미술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 입니다.

회교에서는 더 하지만 기독교에서도 신의 집에는 신도들이 우상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조상(彫像)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그림을 교회에 들여놓도록 허용한 것 입니다. 다만 그림에서 다른 것을 상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기본 원칙 이었습니다. .

이 칙령이 내려진 후 비잔틴(Byzantine) 바실리카안에 모자이크벽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비잔티움(Byzantium)은 동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라고 부르기 전의 이름이며 지금의 이스탄불을 말합니다. 여기서 부터 지중해로 퍼진 미술을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릅니다.

북쪽에서 쳐들어온 야만인에 의해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가 점령 당하자 항구도시 라벤나로 천도를 했습니다. 5세기에 라벤나는 동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비잔틴미술의 영향하에서 찬란한 모자이크 미술이 꽃피게 된 것 입니다.

모자이크(mosaic)란 앞서 미술학교 수업에서 말씀 드렸듯이 돌이나 유리조각으로 꼼꼼하게 짜 맞추어 놓은 그림을 말 하는데 비잔틴 모자이크 미술가들은 우리가 차돌 이라고도 부르는 광택이 나는 석영(石英), 수정과 같은 단단한 돌, 정육면체로 일정하게 조각을 낸 대리석과 칠보를 입힌 유리를 사용했습니다.

동전을 잔뜩 넣고 아프스 천정위의 모자이크를 오랫동안 바라 보려니까 과연 돌맹이들과 칠보 유리들이 각자가 가진 값어치 만큼 기기 묘묘하게 반짝이며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모자이크 벽화의 주인공인 聖書의 인물들이 불가사의하고도 신비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불덩어리를 받아 바위에다 십계명을 새겼듯이, 비잔틴 모자이크 미술가들은 성서 이야기를 실감있게 재현하기 위해 번쩍이는 금빛 벽이나 밤하늘을 상징하는 짙은 청색 배경으로 부터 돌출한 성서의 인물들이 엄숙한 모습으로 신도들을 내려다 보고 있도록 수많은 돌조각을 박아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돌맹이 벽화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육면체 돌조각은 반사각도를 제각기 다르게 고정 시켜서 빛을 받으면 모두가 불규칙적인 사방을 향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형체의 윤곽이 굵은 선으로 투박하고 둔하게 그려졌지만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 것 이었습니다. 또한 돌조각을 윤곽선에 나란히 그림자 지게 덧 붙힌 대조 명암기법을 써서 형상들이 배경 앞으로 더 튀어 나와 보이도록 했습니다.

이 바실리카에서 색과 빛의 향연을 벌리고 있는 모자이크는 그리스도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게 해 주었다는 기적의 성서 이야기를 그린 것 이었습니다. 모자이크 돌그림에서 나오는 풍부하고도 심오한 광채는 교회당의 내부를 장엄하고도 화려하게 꾸며주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촛불조명으로 당시 이것을 본 성당안의 신도들은 큰 감명을 받았을 것이 분명 합니다.

보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느냐가 예술작품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라면, 이 비잔틴 모자이크 야말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놀라우리 만치 아름답고 웅장한 규모의 모자이크를 보게 하려고 미술학교의 모자이크 담당 교수는 학생들에게 라벤나에 한번 갔다 오라고 한 것임을 거기서 알았습니다.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파도바를 거쳐 마지막 귀착지 라벤나에 망명온 이딸리아 詩聖 단테는 라벤나 바실리카의 모자이크를 두루 살피면서 그 황홀함을 ‘색의 심포니’ 라고, 그의 불후의 명작인 ‘단테의 신곡’에서 예찬해 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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