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파리 오디세이아 시작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2920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03.05.18. 13: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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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4

S 형,

대조각가 로뎅이 조수로 삼겠다고 부르자 큰 나무 밑에서는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일화로 유명한 부랑쿠지(Constantin Brancusi).

그는 조국 루마니아를 떠나 뮌헨 미술학교를 다녀보더니 부카레스트 미술학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기어코 파리에 가야 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해 도보로 뮌헨을 출발하여 몇 십일 동안 끝도 없는 시골길, 숲과 마을을 걷고 걸어서 파리에 입성하자 환희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장장 두달동안 걸어야하는 긴 도보 길을 택한 이유는 그렇게 어렵게 도착해야 파리생활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나이 28살 때인 1904년 이었습니다.

나는 내 나이 30살 일때, 1971년8월 29일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습니다. 공항 로비에는 생전 처음 맡는 골르와즈 담배와 엑스프레스 커피 냄새가 코를 찔렀했습니다. 지금도 그 진한 냄새를 맡으면 30년 전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날이 상기 됩니다.

나를 꼭 마중해 주겠다던 K는 갑자기 여행을 하게 됐다면서 자기의 불문과 선배S에게 부탁했으니 파리 도착일정을 그쪽에 알리라는 간단한 편지를 출발 일주일 전에야 받게 보내 왔습니다.

파리 남쪽 오를리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가 내리기로 예정된 공항은 파리 북쪽 부르제 공항 이었습니다. 비행기의 연착으로 암스텔담에서 갈아타야 할 비행기 파리 ‘부르제’ 공항행 KLM을 놓치고 그 다음 편인 에어 프랑스를 탔기 때문에 도착공항이 오를리로 바뀐 것 입니다.

그 때는 유럽행 비행기의 항로가 앵커러지를 거치는 북극 경유 로선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멍청한 짓이지만, 나는 서울을 떠날 때 되도록 먼 코스를 일부러 택했습니다. 노스웨스트 편으로 출국해서 홍콩에서 KLM항공편으로 바꾸어 타고 , 거기서부터 방콕, 뉴델리, 카이로, 쥬리히 그리고 암스텔담을 거쳐 파리에 도착하는 기나 긴 항로 였습니다.

홍콩을 거치게 된다는 것을 안 K는 프랑스는 모든 기계제품이 비싸니 홍콩에 들릴 때 그냥 오지 말고 이왕이면 라디오와 사진기 등을 사가지고 오는 것이 좋다는 정보를 주면서 그 것을 살 때 자기 캐논 사진기의 커다란 줌 렌즈도 하나 사다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홍콩에는 마침 홍콩 외환은행지점에 근무하는 고교동창생 L이 있었고, 입덧으로 고생하는 그의 부인에게 친정에서 보내는 음식을 전해 준다는 핑계로 그 집에서 하루를 묶으면서 쇼핑을 부탁했습니다.

홍콩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안되는 L은 공항에 나갈 때 걸리는 시간을 잘 못 따지는 바람에 내가 타야 할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때 그것이 어찌나 그에게 미안 했던지 홍콩 무더위 때문만이 아닌 땀을 더 뻘뻘 흘렸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그러나 다행히 곧 있었던 다음편 에어 인디어를 타고 방콕공항에서 나의 KLM을 붙잡아 탔습니다.

암스텔담에서 KLM 직원에게 S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나, 미스터 오의 파리 도착 공항과 도착시간이 바뀐 것을 전화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 했으나 그 부탁이 잘 이행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엑스-앙-프로방스’에 2년전 부터 와 불문학을 공부하는 K는 여름 바캉스동안 파리에 올라와 있을 거라며 나를 마중해 줄테니 걱정말고 오라고 했는데 급하게 예정에 없었던 스위스 여행을 훌적 떠나가버린 것 입니다. 소개 받은 선배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지만 K의 그런 연락을 받자 할 수 없이 편지를 써 사연과 함께 나의 도착일정을 보내며 마중을 부탁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해외로 처음 나간 사람은 한국사람이거나 아니거나 도착지 공항에서 처음 자기를 마중해 준 사람을 죽을 때까지 기억 합니다. 다른 별(星)에 살던 사람이 또 다른 별나라에 찾아 왔기 때문에 원거리 전법으로 책이든지 영화든지를 통해서 도착지 별나라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자처하고 싶어도, 그리고 도착한 별 나라의 언어를 좀 할 줄 안다 해도 보이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생소롭기 때문에 얼떨떨한 바보같은 자기를 잠시라도 돌보아 준 일에 대한 생각을 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파리에 수십년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의 별 사람들을 마중해 보았습니다만 나는 그 들을 모두 잊어 버릴 수는 있어도 그 들은 아마도 나를 잊지 못할 것이라 생각 합니다.

어떻튼 공항엔 마중이 없었으니 아무리 공항이 터질 듯 혼잡하다 할 지라도 나에겐 텅빈 공간이나 마찬 가지 였으며 ‘ 아 ! 드디어 내가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파리에 왔구나’하는 기쁨만이 나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중만 믿고 왔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 했지요. ‘이제는 이 별(딴 세상)에서 혼자 모든 것을 풀어야한다, 나의 오디세이아의 시작은 바로 지금 부터 라고 굳게 마음먹었지요.

그러나 S에게 편지를 냈으니 서로 엇 갈리지는 않아야 겠다는 생각에서 S집에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번 신호가 울리니 곧 누군가 받았는데 바로S였습니다. 그는 내가 이맘 때쯤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친절하게도 금방 나갈테니 거기서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침 오를리 공항에서 가까운 도시 ‘앙또니’에 있는 대학 부부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전화를 당사자가 대번에 받기란 쉬운 일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화가 귀하던 때라서 기숙사 길다란 복도 중앙 가운데 쯤에 전화(그것도 받기만 하는 전화기)가 한대씩 있었고, 누군가가 그 앞을 우연히라도 지나쳐야 울리는 수화기를 들 수 있고, 그래서 몇호실 기숙사 방에다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런 고약한 시스템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화창했던 일요일이라 S는 기숙사 정원에서 몇가족과 조촐한 피크닉을 즐기고 있다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방으로 가는 길이었고 전화기 앞을 지날 때 나의 전화벨이 울린 것 이었다니 기적에 가까운 행운 이였습니다. 아니 천우신조(天佑神助) 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의 첫날 스토리가 바뀌었을 테니 말입니다.

나의 편지는 내가 도착한 며칠후에야 S에게 도착했습니다.

내가 K처럼 팔팔 뛰는 청년인 줄 알았다가 늙수그레한 젊잖은 어른(나는 그 때도 벌써 흰머리카락이 섞여 있었습니다.)으로 보여서인지 S는 약간 머뭇거리듯 했습니다. 공항에서 수인사(修人事)를 나누고 보니 학교문예반에 놀러가서 보던 고교 선배 얼굴이어서, 그래서 얼른 ‘형, 그렇게 저에게 존대말을 쓰지 마시지요’ 했더니 금방 그럴까 하며 반말을 쓰기 시작 했는데 그게 잘못돼서 지금까지도 그는 나에게 반말을 하고 나는 꼬박 꼬박 그에게 존대말을 해야만 하는 신세(身世)가 되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 대화를 엿 들으면 저 머리 까만 저 젊은 녀석이 버르장 머리 없게도 머리 하얀 늙은이에게 무슨 말버릇이 저 모양이지 할 터인데도…

나는 곧 공항에서 10여분 밖에 안 걸리는기숙사 정원 가족피크닉의 파장에 합류했다가 S의 딱정벌레 폭스바켄을 타고 ‘꺄르띠엥 라뗑’(라틴 쿼터 : 대학가)의 소르본느대학에 면해 있는 길 ‘뤼 데 제꼴’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호텔은 낡았고 어둠침침하고 공동 화장실이 복도에 있는 허술한 3류호텔 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한 마음이 되면서 나무토막처럼 쓸어져 깊은 잠을 잤습니다.

바깡스가 거의 끝난 8월 말이라서 시내는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앙또니’에서 국도 20번 도로로 해서 ‘뽀르트 도르레앙’ 를 통해 파리로 입성하여 ‘쌩 삐에르 드 몽루즈’ 높은 뾰죽탑 성당을 정면으로 보며 오른 쪽을 향해 ‘벨퍼르의 사자’(자유의 여신상의 바르똘디 작품)가 앉아 있는 ‘쁠라스 당페르 로스로’를 지나 ‘불르바르 쌩미셸’로 해서 꺄르띠에 라뗑에 이르는 이 길은 2차대전 때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진주한 르끄레르 장군의 길이었지만, 나도 개선한 장군인양 거침없이 이길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파리 외곽에서 이 코스에 들어 서면 언제나 30여년 전에 남모르게 뛰었던 맥박을 느끼며 온몸이 활활 달아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하룻밤 편안한 잠을 잔 후 호텔을 떠나, 그때 부터 살 거처를 찾아야 할 때 임시로 있을 방값이 싼 대학기숙사 방을 얻었습니다. 파리시 남쪽 변경에 있는 긴 거리 ‘불르바르 쥬르당’에 면해있는 거대한 정원을 가진 ‘씨떼 인떼르나시오날 유니베르씨떼르’(국제 대학기숙사 : 속칭 ‘씨떼’ 기숙사)는 각나라 기숙사가 산재해 있는데 나는 그 중 ‘튀니지’관에서 쉽게 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숙사에 있으면 그곳에 있는 대형 대학식당까지 이용할 수 있어서 먹는 문제까지도 해결됐습니다.

여름 바깡스 동안은 학생들이 고향에 돌아 가거나 여행을 다니니까 ‘씨떼’가 비어서 ‘빠사졔’(旅人)들에게 조금 비싸게하여 빈방을 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 K라는 학생부부가 시떼 기숙사에 신청해놓고 기다리던 부부 기숙사 방이 나왔기 때문에 집을 옮겨야 한다는 스튜디오(단칸 아파트)를 소개받아 그 곳을 나의 거처로 정했습니다. K가 제시한 스튜디오 인계 조건은 그가 남기고 가는 물건과 음식 그리고 마시고 남은 음료까지도 다 사야 한다는 것이긴 했지요.

그 스튜디오는 파리 15구, 메트로 12번선 ‘꽁방시용’역을 이용할 수 있는 구역인 ‘뤼 드 라베 그루’ 119번지로 오래된 3층집의 지붕밑 방 이였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부엌이 있고 목욕탕과 화장실이 조그맣지만 따로 있어서 너무나 훌륭한 거처 였습니다. 임대료는 500프랑(약 미화100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얼마 후 집값을 덜어 보려고 서독 광부 출신으로 프랑스에 와서 자동차 정비 공장에 다니는 C라는 분과 방을 나누어 쓰면서 거기서 7개월을 살았습니다.

바깡스에서 돌아온 K는 물론 줌 렌즈를 찾으러 내 스튜디오에 왔다가 며칠밤을 묶다 갔고 그 후부터는 그가 파리에 올라올 때면 그를 맞아 주어야 하는, 그렇지 못 할때도 몇번 있었을 것이지만, 그런 나의 스튜디오가 됐습니다.

내 옆엔 아주 호호 백발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몇주일에 한번인가 자식들이 잠시 왔다 가는 쓸쓸한 분 이었습니다. 그 외로운 할머니는 옆에 사는 젊은 내가 움직이는 것이 너무 보고 싶어서인지 화구를 짊어지고 나갈 때면 부스럭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내다보며 잘 다녀 오라고 손짓 했으며, 사생을 갔다 와 보면 할머니의 자식들이 놓고 가는 싸구려 과자며 빵을 나의 문고리에 봉투 채 매달아 놓곤 했습니다. 그 할머니 이름은 ‘앙젤’이였습니다. 내가 살던 추억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중에 그 집에 가보았더니 앙젤은 이름같이 천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버리시고 거기에 이제 있지않았습니다.

내가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인10월 초부터 파리 지하철 파업이 시작되고 점점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그 때 파업하면 이것이 프랑스로구나 할 정도로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다른 노동자들도 연대의식을 발휘하여 동정파업을 했는데, 그런 총파업은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꼭 일어났습니다. 그런 날은 도시와 행정이 완전히 마비돼 버렸습니다. 그 때도 아마 보름이상 지하철이 끊겼던 것 같습니다.

나는 꽁방시옹 역에서 메트로를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서 ‘몽빠르나스’ 역에서 ‘뽀르트 끄리냥꾸르’로가는가는 4번선으로 갈아 타고 ‘쌩-제르망-데-프레’에서 내려서 ‘뤼 보나빠르뜨’길로 해서 등교 했습니다. 메트로로 걸리는 시간은 약 25분 안팍이면 됐습니다. 그런데 장기 파업 때문에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매일같이 학교에 걸어 다녀야 했는데 오고 가는 데 시간이 3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파리의 길 구조는 방사형이여서, 길을 몰라 한번 빗나가면 헤매기 십상이 었지요.

그래서 그 때 길이름을 달달 외면서 걸었던 덕분에, 또한 그 후에도 걸어 다니면서 파리를 스켓치한 덕분에 웬만한 파리시내의 큰길, 골목길 할 것 없이, 길이름들을 다 알고있는 택시운전사 못지않게 잘 알게 됐습니다.

파리에서 이렇게 나의 오데세이아를 시작하고 있는 동안, 부랑쿠지가 에꼴데보자르를 다니며 밤에는 접시를 닦고 늦게 돌아와 아무것도 없는 지붕밑방 들어누우면 보이는 높은 벽에 써 놓았다는 글귀,

‘너는 예술가임을 잊지 말라 ! 용기를 잃지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아라 ! 성공하리니 ! ‘

이 글귀를 매일 외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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