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뜰리에에서 맛 본 실패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183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2.14. 17: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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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8

눈은 사람의 감각기관 중에서 다른 감각에 못지않게 매우 섬세하고 예민 합니다.

중학교 때 국어시험에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綴)한다’가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뜻이 글의 본질을 파악하고 간파하는 혜안(慧眼)인 것을 알았을 때 ‘아 ! 그런 뜻이로구나 !’ 이 한가지 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게 됐구나 했습니다.

사람들은 싫은 것을 ‘눈에 가시 같다’ 라고 합니다 .귀여운 손주를 보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할머니처럼, 사람들은 처해진 상황에 대한 첫 반응을 눈으로 합니다. 그러나 시각만이 그처럼 빠르다고 할 수는 없을 테고, 그 보다 더 빠른 감각은 경우에따라 후각일 수도 있고 청각, 미각, 촉각일 수도 있습니다. 육감은 더욱 빠르겠습니다.

그런데 교양의 정도를 말할 때도 ‘눈이 높다’고 말하고, 물건선택을 잘 하는 사람을 보고 ‘눈이 있다’고 하고, 싫어 하는 것에 대해 ‘눈 뜨고 못 본다’라고 합니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을 우리는 ‘첫 눈에 반했다’라고 하고 ‘눈을 감으면 그대 생각이 난다’고 할 정도로 눈은 ‘현실’이어서, 잘 정리된 상황을 ‘일목요연하다’라고 하고 실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표현 합니다.

풍경(풍경화)은 그 옛날에는 인물화에서 주인공의 들러리(배경) 였다가 제일 나중에 생긴 독립된 서양화의 한 장르 입니다. 뻬어난 자연경관(풍치)을 볼 때 ‘한폭의 그림같다’ 는 아름다운 풍경화에서 비롯된 말이니, 이 표현들은 우리의 시각이 만드는 단어들로 형성된 구절(句節)이 아니겠습니까 ?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는 ‘귀는 덜 밝아도 눈만은 밝다’고 말하는 데, 그 뜻은 프랑스엔 음악가(작곡가)는 적고 미술가는 많다는 것을 둘러 말하는 것 입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는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미술관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프랑스하면 프렌치 캉캉이나 향수로 쉽게 연상되지만 일찌감치 수학이 발달하여 첨단 과학분야에서도 무시 못하는 경지를 이룬 나라이고, 굴지의 농업국가로 먹고 살 식량이 대대로 풍족한 나라입니다. 프랑스인들이 그래도 가끔 들 먹이는 자존심과 프랑스의 영광은 그들의 문화에서 비롯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란 미술가들의 업적을 가르킨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고대 로마문화와 피렌체 르네상스시대가 부러워 자기네 나라에서도 그러한 찬란한 문화를 소유하고 꽃 피우기 위해서 프랑스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미술정책(미술 수입정책)을 이딸리아를 모델로하여 펼쳐 왔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프랑스인이면서도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위대한 화가 니꼴라 뿌생(1594-1665)이후 부터 프랑스는 점차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미술의 중심지가 됐으며 여러 세기동안 이것을 누려 왔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인에게 프랑스인으로서의 높은 자존심을 갖게 해 주었던 것 입니다.

매년7월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상젤리제 대로에서 펼치는 화려하고 장엄한 경축 퍼레이드는 언제나 ‘에꼴 뽈리테크니시엥(이공과대학 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위풍 당당하게 행진을 시작 합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관광객들을 잔뜩 태운 파리시내를 일주하는 투어버스가 루브르미술관 건너편 센느 강 뚝길 ‘깨 말라께’에 있는 ‘에꼴 데 보자르’ 앞을 지날 때면 관광 안내자는 유창한 말 주변으로 이렇게 과장해 설명할 것 입니다. .

‘‘우리가 지금 지나는 왼편이 유명한 파리미술학교인데 이 학교출신들이야 말로 저 세느강 건너편에 있는 루브르미술관(프랑스 모든 미술관)의 주인공들 입니다. 이 주인공들은 자기들 천직을 지키느라 넉넉지 못한 삶을 대강 살다 갔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으로 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을 프랑스로 불러들이게 하는 장본인들 입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관광수입이 많은 프랑스는 모두가 이 학교출신인 미술가들 덕분이어서 지금의 프랑스인들은 미술가들이라면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나는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구상화로 진로를 바꾸고 파리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한 후 입학시험 때 시험관에게 보여주었던 에스키스(데생, 크로키등 작품을 하기위한 초안 스켓치등)를 넣은 가르똥 가방을 들고 본관 1층에 있는 샤쁠렝-미디(Chapelain-Midy) 교수의 아뜰리에에 가서 보여주고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샤쁠렝-미디를 택한 것은 그의 아뜰리에가 미술학교에서 구상화를 제대로 잘 배울 수 있는 아뜰리에일 것이라는 정보를 재학생들 한테서 들었기 때문였습니다.

과연 아뜰리에에는 학생수도 많았고 학생들의 수업태도도 진지했습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이 지나치게 진지한 분위기였던 것 같기도했으나 나는 거기서 인물화를 몇 점 완성했습니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교수는 얼마 동안 나의 작업을 지켜 보더니 너는 모델에게서 보이지도 않는 색을 곧잘 쓰는데 그러면 안되고 ‘있는 대로의 보이는 색 만을 써서 표현해야 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주위의 학생들을 보니 모두 보이는 대로만 그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보이는 대로 그린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입니다. 보이는 대로만 그리려 하다가는 점점 보이는 것과 틀리게 된다는 사실을 화가들은 압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그리더라도 그 대상은 시시 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화가 별로 있을 수 없다고 여긴 석고데생을 옛날부터 데생의 기초공부로 해왔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대로 그리기가 어려운 까닭은, 대상이 인체모델이었다면 매번 포즈를 취할 때 마다 자세가 조금은 변 할 것이고, 빛에 따라서도 변 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서도 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그리다가는 결국은 그림을 허둥 지둥 망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 다 빈치가 인체를 정확히 파악해 그리려면 인체해부학부터 배워야 할것이라고한 했던 것 입니다. 살갗은 움직이고 옷 주름은 변해도 마른 사람이나 뚱뚱한 사람이나 골격은 그대로 일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샤쁠렝-미디 아뜰리에에서 취한 모델은 발레리나가 검정색 타이츠를 입고 넓적한 모델대 위에 놓인 다리가 긴 의자에 앉아 팔 뒷금치는 무릎에 받치고 팔을 턱에 괴고 정면을 응시하는 포즈였습니다. 내가 지금 보는 색 이라곤 모델의 흰 피부색 이외에는 모두 무채색뿐인 모델대, 키 높은 의자와 그리고 회색빛에 가까운 오래된 벽이 배경 이었습니다.

그 실기시간에 샤쁠렝-미디 교수의 엄격한 지시를 잘만 따른다면 제임스 매크릴 휫슬러가 그린 명작 ‘회색과 검은색의 조화’를 뛰어 넘는 걸작이 될수도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색의 혁명을 일으킨 인상주의 운동에 합세했던 미국화가 휫슬러는 나중에는 모순되게도 빛에 따른 색채의 효과보다는 조용한 색면의 구성에 더 관심이 끌려서 마침내는 수평과 수직으로 된 회색빛 실내 구도 위에 검정색 옷을 입은 늙은 어머니를 그렸고 그 것을 발표할 때 ‘회색과 검은색의 조화’라는 타이틀로 했습니다.

공경(恭敬)해야 할 자기 어머니를 그려 놓고는 ‘회색과 검은색’ 운운한 이 타이틀때문에 그는 스캔들에 말려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그 진가를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회색과 검은색의 섬세한 균형을 기묘하게 성공시킴으로써 늙은 어머니의 체념뿐인 쓸쓸한 여생의 시간을 무채색에다 교묘히 녹여서 잔잔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쓸쓸하다거나 슬픈 여생을 보내는 우리네 어머니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을 직접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오히려 편한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 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색채가 요란한 인상파 그림들이 있는 방에서 홀로 무채색 그림으로 버티고 있으면서도 많은 관람객들로부터 항상 사랑받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휫슬러의 이 작품을 떠올리면서 회색의 입방체 모델대와 다리가 높은 진한 회색의 사각의자와 그 뒷편 뿌연 벽 사이에서 수직과 수평구도를 만들고 성실한 묘사로 검은 타이츠의 발레리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발레리나를 그린 다기 보다 휫슬러처럼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시각은 무채색뿐인 대상들 속에서도 역광에 의해서 혹은 반사광에 의해서 찰라적으로 요상한 원색들이 눈에 띄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에 어떠한 효과를 더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을 수 없는 찰라적인 튀는 색채를 조금씩 여기 저기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분명한 나의 환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주 시간에 샤쁠렝-미디는 내가 거의 완성한 그림을 보더니 ‘너는 나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말을 잘 듣고 있다고 생각될 때까지 나는 너의 그림을 품평하지 않겠다’고 단언을 하는 것 이었습니다. 나는 여태껏 어떤 아뜰리에에서도 이처럼 엄격하고 단호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당황했고, 갑자기 심각해 졌습니다. 이대로 갔다간 지독한 간섭도 감수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나는 아뜰리에를 잘 못 선택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나에게 그림지도를 못 하겠다고 했으니 아뜰리에를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나는 화구를 챙겨서 바로 옆방인 얀켈(Yankel) 아뜰리에로 옮겼습니다. 얀켈 교수의 아뜰리에에 어쩌다 구경갔을 때 그곳의 학생들은 훨씬 자유스러워 보였고, 다양한 색채사용이 허락돼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얀켈은 아무 말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의 아뜰리에 학생이 되었습니다.

나는 샤쁠렝-미디에게 쫓겨 나면서 마티스가 미술학교에서 처음 들어간 아뜰리에에서 쫓겨난 일을 생각했습니다. 마티스는 에꼴 데보자르에서도 명성이 쟁쟁하던 윌리암 부그로(William Bouguereau)에게 야단을 맞고 그의 아뜰리에에서 쫓겨 났습니다. 부그로 교수는 처음부터 마티스가 못 마땅해서 ‘‘너는 화구를 다룰 줄 모른다. 석고 데생부터 다시 배워야 겠다. 연필을 그렇게 쥐는 법이 어딨느냐’’ 하고 사사 건건 흠을 잡다가 마침내 그를 쫓아버린 것입니다.

홀가분 해진 마티스는 윌리암 브그로 교수의 공허한 완벽성을 추구하는 수업을 한탄하면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아뜰리에로 찾아가서 환영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모로 교수의 아뜰리에는 바로 샤쁠렝-미디 교수의 아뜰리에 였습니다. 죽기 전 6년간 에꼴 데보자르 교수로 있었던 귀스타브 모로(1826-1897)의 아뜰리에는 근대 서양미술사상 가장 훌륭했던 미술학교 교실로 손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유화 물감을 문질러서 뭉게는 얼룩기법을 선 보여 아카데믹한 교수들로부터 세기말적 절충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 모더니즘의 창시자 입니다. 상징주의적이고 신화적인 영감에 사로잡힌 화풍을 가진 모로는 제자들로부터 열열한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20세기 프랑스 미술의 대 천재들인 죠르즈 루오(George Rouault), 앙리 마티스와 알베르 마르께(Albert Marquet)를 배출시킨 위대한 스승 이었습니다.

많은 자기 그림들을 에스키스만 해놓고 제자들에게 분배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완성단계에서만 자신이 마지막 정리를 하여 작품을 끝내곤 하던 습관을 가진 선생이 었지만 자기 화풍을 제자들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로는 늘 마티스에게 ‘자네는 앞으로 회화를 단순화 시켜 나갈 화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사랑해 주었으며, 수제자였던 브라크에게는 회화는 외적인 표현보다는 내적인 비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의 개성을 부추겼기 때문에 그는 전통을 고수하는 화가들만이 받는 로마상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로마상은 젊은 예술가들을 로마에 보내어 빌라-메디치스 에서 수련시키며 대가로 성장시키는 유명한 상 입니다.

결국 모로가 예견한대로 마티스는 일생동안 색채를 그리며 단순화된 기법을 통한 화풍을 완성했으며, ‘주름이 안 생기는 者 있느냐 ?’라고 한 작품의 제목 처럼 루오는 평생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본 화가로 세기의 거장이 됐으며, 마르께는 햇살이 엷은 안개 속을 뚫고 퍼지는 조용한 파리의 아침풍경을 예민한 감각으로 신비하고 아름답게 그려내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화가가 됐습니다.

이와 같이 한 선생 밑에서 그 선생의 화풍을 이어 받도록 강요 당하지 않고 각자 뚜렸한 개성을 지킨 세 화가가 배출된 것입니다. 모로는 현대미술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단단히 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 중의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우리(동양사람들)가 말하기 좋아 했던, 좋은 스승으로부터 그 스승보다 더 훌륭한 제자가 탄생한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좋은 예가 아니었겠습니까 ?

나는 샤쁠렝-미디 아뜰리에에서 쫓겨 나오면서 모로와 같은 선생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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