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그랑드-쇼미에르 시절의 추억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3332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2.13. 16: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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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9

S형,

어제는 파리에 몇 십년만에 큰 눈이 내렸습니다. 어제 아침까지 며칠간 줄곧 내리던 비가 기온이 급강하 하면서 눈으로 변하며 드디어는 서울에서나 보았던 함박눈으로 펄펄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뜰리에에서 내다 보이는 도시풍경이 휘날리는 눈꽃송이로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파리시내를 내려다 보고 서있는 키다리 에펠탑은 눈발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되고, 건물들도 펄럭이며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눈꽃송이 파편으로 어른거려 요술을 피웠습니다.

이 희환히 눈내리는 장면을 재빠르게 담아 스켓치하고도 싶었지만, 그 보다는 함박눈속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늘 비를 맞고 걸어야 하는 파리에서 눈을 맞고 걷는다는 것이 너무 낭만적일 것 같아서 허겁지겁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센느강가 에펠탑이 있는 ‘샹-드 -마르스’ 공원쪽으로 향해 무조건 걸었습니다.

‘깡브론느’로터리를 지나자 마자 아차 신발을 잘못 신고 나왔구나 했지요. 벌써 발목까지 눈에 푹푹 빠져서 양말이 젖고 있었습니다. 돌아 갈까 했지만 가봐야 눈길을 걸을 별다른 신이 없으니 그냥 걷기로하고 공원까지 갔더니 벌써 나처럼 단화나 운동화를 신은 빠리지엥들이 눈밭에 발자국을 내며 깔깔 웃으며 몰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뭉쳐 서로 던지기도 하고 눈 위에 나뒹굴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모두들 즐거워 했습니다. 키다리 여인 에펠탑은 눈발에 휩싸여 희미한 모습이 요염한 자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삭 젖어 버린 발이 시려서 더 이상 걷기가 어려워 두정거장 밖에 안되는 거리였지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 눈길의 산책이 오늘의 시작 이였습니다.

나는 프랑스에 올 때 비정규유학생 여권을 받아 지니고 왔습니다. 비정규 유학생 여권엔 여행목적이 연구로 표시 되있고 유효기간은 6개월짜리 였습니다. 우리나라엔 그때 당시 아무나 외국여행을 떠날 수 있는 단순한 관광을 목적의 여권이 없을 때였고 여행비나 체재비도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돼있어서 무일푼으로 출국했으니 그때부터 정처없는 나의 ‘오디세이아’는 시작 된 셈 입니다.

여권발급 출국수속신청서류로는 ‘아카데미 들라 그랑드-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Chaumiere)’ 미술연구소의 수강등록증을 제출해 밟았습니다. 그 수강등록증은 파리에 있는 한사람건너 지인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우송 받았습니다.

8월 29일 파리에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 나는 다음날 아카데미에 갔습니다. 20세기초 ‘에꼴 드 빠리(Ecole de Paris)’시절 화가들이 많이 모이던 유명한 까페가 즐비한 몽빠르나스에 있는 아카데미 들라 그랑드-쇼미에르에 가서 정식등록을 하고 유화교실인 이브 브레이에(Yves Brayer) 아뜰리에에 다니며 인물화를 한달간 그렸습니다.

브레이에 교수는 나중에 보니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어떻게 보든지 에두아드 마네를 숭배하는 화가 였습니다. 그는 마네풍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프랑스 남쪽지방과 스페인의 건조한 산야 풍경을 즐겨 그렸습니다. 키가 훤칠한 이 노화가는 영국 에리자베스 여왕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화가 대표로 영접대열에 끼어 있다가 여왕과 악수하게 된 행운을 크게 자랑하였는데 여왕과 악수한 손을 한달간이나 씻지 않았다는 신기한 일화를 거기 오래된 제자들이 새로 들어오는 연구생들에게 전해주곤 했습니다.

이 노화가는 프랑스에 온지 12년만에 처음으로 연 나의 개인전에 지팽이에 겨우 의지하면서 내가 부재중일 때 다녀 갔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의 마지막 외출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화랑주인은 그와 같이 유명한 분이 다녀 갔다고 여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얼마 후 그 분은 돌아 가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처럼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추상미술 작업을 하다가 파리에 도착하자 제로 베이스로 나를 놓고 그림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 하겠다는 마음을 정했을 때 나의 그림이 구상화 작업으로 바뀐 곳이 바로 이브 브라이에 아뜰리에서 입니다.

브레이에 교수는 처음부터 나의 재능을 높이 사주면서 나를 아주 좋아 했습니다. 일본사람은 아카데미에 많았으나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드믄일 이라면서 놀라워 하였고, 나의 작품을 품평해 줄 때마다 번번이 도대체 너는 몇 년간이나 그림을 그려왔느냐, 어느 도시에서 왔느냐고 하면서 나의 재능이 신기해 보인듯 볼때마다 칭찬해 주었습니다.

나는 아카데미에 나가지 않는 날은 방에서 우두커니 지낼 수가 없어서 화구를 들고 센느강변으로 나가서 옛날의 인상파화가들 처럼 현장에서 사생화를 만들었습니다. 그해는 10월말까지도 날씨가 화창했는데 가을철 이런 따듯한 날씨가 계속되는 것을 프랑스에서는 ‘에떼 앵디앙’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영어로는 인디언 서머 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어원이 캐나다에서 가을인데도 여름날씨가 계속될 때 쓰이는 그 날씨의 별명인데 다른 나라에서도 차용해 흔히 쓰고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행운처럼 계속된 화창하고 온화했던 날씨에서 그린 유화들은 나의 첫 파리생활에서의 아름답고 애처로웠던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나는 아카데미에 머물며 쭉 다니고 싶었으나 내 방값 만큼이나 월사금이 비싼 까닭에 더 다니지를 못했습니다. 미술학교 쪽은 나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겐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라면서 아카데미에서 모두들 말렸습니다.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미술학교와 같은 젊은 열기는 부족했지만 훨씬 친화적이고 점잖고 안전했습니다. 미술학교에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과 어울려야 했으니 아무리 나이차를 따지지 않는 서양에서라도 나는 그들보다 의젓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 화판과 물감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구경꾼들을 염두에 두지않고 사생(寫生)을 하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호기심 많은 빠리지엥들이 오가는 센느 강변이나 번화한 길거리에서 감히 이젤을 버텨놓고 사생을 할 용기를 못가졌을 것 입니다. 보통 수줍은 동양인이라면 이런 길거리 작업은 엄두를 못 내고들 있었습니다.

파리시절이 시작된 이 초기작품에 속하는 그 때 그린 유화 ‘뽕 데자르가 있는 풍경’(김창세 소장)과 ‘솔페리노 다리가 있는 풍경’(이희일 소장)은 이브 브레이에 아뜰리에에 다닐 때에 그린, 사생화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화작품들 입니다. 이 작품을 보게된 이브 브레이에 교수는 ‘솔페리노 다리가 있는 풍경’을 ‘사롱 도똔느(Salon d’Automne)’에 출품하도록 추천해서 입선이 됐습니다. 이 작품들은 사생화인 이상, 현장감을그대로 살려서 사실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 점에서 인상주의 화풍과 유사해 보이지만 동양적인 필치가 힘있게 엿 보이는 서정적인 나의 세계가 재현된 풍경화였다고 여깁니다.

오랫동안 화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던 유명한 살롱 도똔느는 그 때는 벌써 옛날 20세기 초에 빛나던 영광을 유지하지 못하고 명성을 점점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나는 파리에 온지 한달여 만에 사롱 도 똔느 공모전에 입선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지12년후, 이브 브레이에가 나의 개인전에 일부러 다녀 간 것은 비록 한달동안이 나마 자기 아뜰리에의 제자였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서울의 H호텔에서 그의 작품을 구입하도록 주선해 주었기 때문일 것 입니다. H호텔은 개관하면서 호텔 장식용 미술작품을 파리에서 구입하려 할때 호텔주는 나에게 구입할 작품들을 추천하도록 의뢰 하였었고 나는 이브 브레이에의 수채화 몇점을 구입작품리스트에 넣었던 것 입니다. 그림을 판 아브뉴 마띠뇽에 있는 쟌센 화랑에서는 누가 어떻게 당신 그림을 사가더라는 자초지종을 작가에게 전했을 터이고, 작가는 그것을 비망록에 메모해 놓았었는지 몇 년 후에 내 개인전 소식을 접하자 거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시장을 다녀간 것 이었습니다.

화가가 작품을 판다는 것은 참으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보통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일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든지 까다롭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브 브레이에의 어려운 외출을 보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화가는 고된 창작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경우도 역사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반 고호의 경우같이 생전에 작품 한 점만을 겨우 팔았다면 절망될 것이고, 또 모딜리아니 처럼 가난에 찌 들리는 악순환 때문에 병 들었다면 제 아무리 천재작가라 하더라도 화가의 종말은 비극 그 자체일 뿐, 참혹할 따름입니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 가보지요.

나중에 다시 얘기를 꺼내게 될 파리 1대학과 8대학의 조형예술학과는 미술이론을 추구하는 문과대학의 일환이어서 실기수업시간이 있는 순수미술학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파리에 있는 두개의 미술학교외에 미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아카데미 그랑드-쇼미에르와 아카데미 쥬리앙 같이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온 역사가 오랜되 사립기관인 아카데미들 입니다.

‘아카데미’의 어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학파의 명칭에서 온 학술적 용어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미술가들이 자기들 미술연구기관에다 차용해다 쓰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 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여러 분야에 전지 전능했던 대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빗 대여 말하기를 좋아하던 화가들은 화가란 한낱 손재주만 있는 ‘쟁이’가 아니라면서 자기들을 학문과 과학을 탐구하는 학자들과 대등한 부류로 인정해 주기를 진정으로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제자를 키우는 곳인 사립 미술연구기관을 ‘미술 아카데미’라고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미술학교는 한때 세잔느의 입학을 거절했듯이 입학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나 한편 수업료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미술아카데미는 미술학교에 못 들어간 학생들이 화가의 꿈을 준비하고 실현 하려던 하나의 자유스러운 실기장 이었습니다.

미술학교는 프랑스의 모든 대학과 같이 대학등록금이나 수업료가 없어서 학비 걱정없이 다닐 수 있을 뿐더러 정부가 대학생에게 주는 수많은 혜택을 공히 누릴 수 있지만 아카데미는 다녀 봐야 디플롬 학위도 받을 수 없고 수강료도 꼬박 꼬박 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넉넉한 입장이 아닌 학생신분으로는 계속 다니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서도 요즘 아카데미에는 나이가 많아 미술학교에 다닐 수 없는 성인과 자기의 직업과 병행해서 미술창작활동을 하려는 직업인이나 여가로 취미활동을 하려는 은퇴한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 일시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불어에 능통치 못한 외국인 화가들도 많이 이용하게 됩니다.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교실은 역시 데생교실인데 그랑드 쇼미에르에는 아카데미의 문을 들어서자 마자 왼쪽 교실이 누드모델이 항시있는 데생실 입니다. 아뜰리에에 등록한다면 데생실엔 언제라도 자유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누드모델만 이용하려면 아침과 오후로 나뉘어진 시간에 극장식으로 표를 매번 사가지고 들어가서 데생 연습을 하면 됩니다.

모딜리아니의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을 픽션을 가미해서 만든 흑백영화 ‘몽빠르나스 19번지’에서 저주받은 화가 모디(제라르 필립)와 쟌느(아누쿠 에메)가 처음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 아카데미 그랑드-쇼미에르의 데생실 입니다.

미술학교가 ‘글자그대로의 아카데믹한 교육 (판에 박힌 엄격한 그림)’에 치우쳐 있을 때, 자유스럽게 각자의 개성을 인정한 미술 아카데미에 다니던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 지망생들이 2차대전 전후해서 활발히 진출하여 미학의 척도가 무너진 화단에서 쟁쟁한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아카데미의 위상이 매우 높아 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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