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미술학교 이야기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1833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2.06. 23: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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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3

S형,

어제 세모저녁엔 불지핀 벽난로 앞에서 해가 바뀌는 시각을 기다리며 나의 모든 친구들을 생각해내며 포도주잔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것이 포도주 한잔 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눈앞에 떠 올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병을 다 비울 수 있는 만큼의 친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화가나 음악가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세상의 고난을 있는대로 다 겪은 비극적 생애를 보고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진실성이 강한 예술은 고난과 슬픔 속에서 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술가들은 착상이 안되고 창작이 마음대로 안될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애에 젖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나는 어제 저녁에 프랑스 사람들이 해를 넘기는 계절이면 모두 즐겨 먹고자하는 생굴을 한 상자 사다놓고 포도주 창고를 뒤져서 포도주 한병을 찾아다 식탁을 차리며 행복해 했습니다.

프랑스는 십진법의 나라인데도 굴의 숫자를 셀 때만은 12진법을 씁니다. 그러나 굴 한 타스(한 다즌)를 달라면 곯은 것 까지 미리 감안해서 13개를 세어서 담아 줍니다.

생선을 날로 먹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이지만 생굴만은 옛날부터 프랑스 식탁에 올려져 왔습니다. 생굴은 샤르뎅의 정물화에서 등장하고, 마티스의 그림에도 등장해 있습니다. 은색 쟁반 위의 레몬(레몬색)과 면도날이 수없이 돋아난 꺼칠한 조개 껍질의 조화는 반스 재단 소장품인 죠르즈 브라크의 한폭의 유화를 연상케 합니다.

짭잘한 바닷물이 혀에 닿을 때면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굴 상자의 렛델을 보니 노르망디의 조그만 어항 ‘쌩-바스트-라-우그’라는 굴밭에서 온 것 이었습니다. 20여년 전 그곳에 스케치여행을 가서 텐트를 쳤던 기억이 생깁니다.

생굴은 백포도주하고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 그런데 나는 포도주 창고에서 백포도주 중에서도 상품인 ‘부르곤뉴’산 1985년도 ‘머르소’를 기적적으로 찾아내 떠들썩 하진 않지만 신비하고도 웬지 신나는 설날제야(프랑스 사람들은 레베이용이라고 합니다)를 지냈습니다. 파리 샹제리제엔 40만 명이 모였다고 하고 뉴욕 타임스퀘어엔 그것의 두 배인 80만 명이 모여서 새해를 맞아 환성을 질렀다고 아침 라디오 뉴스가 알리고 있습니다. 형도 나와 같이 어제 그믐날 저녁을 위하여 벽난로에 불꽃이 보기 좋다하시던 사과나무 장작불을 집히셨던가요? 좋아하시는 붉은 포도주는 어느 정다운 사람하고 나누셨나요?

오늘은 프랑스 미술교육, 입학제도와 교과목, 그리고 교수방법 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나는 한때 학교 선생과 화가를 겸할 것인지, 전업화가로 나갈 것인지 매우 망서렸었다는 사실을 아실 것 입니다. 그러나 선생이든 화가든 후세에 무언가 남기려는 뜻은 마찬가지일 것 입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일선교육 현장에서 직접 가르칠 테지만, 화가가 작품을 남겨 그 작품이 미술관에 걸린다면 그것도 시차를 가진 간접적인 가르침이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정신적 유산을 남길 수 있다면 후대나 후세에 대해 교훈을 남기는 선생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화가 지망생들이 열심히 미술관을 찾는 이유겠습니다.

내가 화가인 동시에 미술교육자가 되기를 기피하고 전업화가가 된 이상 미술교육자나 그 미술교육기관에 대해 비판을 가할 자격이 있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하란 법도 없겠습니다.

나의 어렸을 때의 미술 선생들은 모두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았습니다. 미술대학 때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방 후 우리나라 미술대학을 졸업한 분들 이었습니다. 물론 이분들은 모두 일본식민지 교육기관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선생들의 제자들 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서양미술을 직접 교육 받았던 선생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서양화 미술분야의 불행 이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미국식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을 때 미술교육기관 설립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학예분야에서 우리나라 전통을 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순수한 교육기관은 국악원 정도일 것입니다.

종합대학 안에 단과대학으로 미술대학과 음악대학을 포함시킨 것은 일본식 제도를 본 딴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미국식 제도일 것으로 짐작 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식 제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술교육만으로 출발한 H대학 조차도 나중엔 종합대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일본은 서양식 교육제도를 받아 드리면서 미술교육기관만큼은 종합대학 속에 두지 않고 따로 떼어 놓았습니다. 그냥 미술학교라고 해서 일반인문대학교와 분리해 전문기관으로 설립 했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교육기관은 센느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와 빵데옹 옆에 있는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Arts decoratifs)입니다. 이 두학교는 모두 명칭에 '고등’이라는 형용사를 얹어 쓰면서 미술교육기관 으로 독립해 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건축과는 파리 국립 고등 미술학교 속에 있었습니다. 파리엔 이 둘만이 학교형식의 고등미술교육기관 입니다.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 새롭게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이하 파리미술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학교의 교육프로그람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소개해 보렵니다.

이 학교는 얼마 전부터 전통적인 교수중심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매 학년 진급시험을 치루는 학년제 제도가 새로 도입되었고, 입학시험도 학교에서 시험관 임석아래 실기시험으로 치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원제가 없었던 이 학교에 최근 내국인과 외국인 입학지원자수가 너무 많아져서 입학을 제한하기 위한 것 입니다. 외국인 지원자 학생들에게는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프랑스어 실력을 테스트하기 때문에 입학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프랑스는 대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많은 혜택을 주는 지침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미술학교 학생들도 그 혜택을 그대로 누리기 때문에 학생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어서 입학시험제도의 변경을 불러온 것 입니다.

이 학교는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이라 할 수 있는 ‘바깔로레아’를 취득하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기시험만으로 입학학생을 선발 합니다.

1971년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시험관에 보일 작품을 자기집에서 자유롭게 준비해서 시험일에 가져가서 보이고 합격 불합격을 기다렸습니다. 가져가서 보여야 할 작품들은 특별히 지정된 ‘도시에’(시험일에 보여주어야 할 자료)는 아닙니다. 데생, 크로키, 수채화, 과슈, 유화, 파스텔 등등 무슨 재료를 사용하든, 또 무슨 내용을 담고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할 줄 아는 어떤 표현의 결과만 가져가 시험관에게 보이면 됐습니다.

시험관은 교장선생과 대여섯 명의 선생으로 구성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학교는 입학지원자가 미술학교에 들어와서 가르치는 교육을 제대로 따라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여부만 살피는 것 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합격통지를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만든 작품(완성작이든 습작이든)을 가르똥(화판인 동시에 가운데 칸에 작품들을 넣고 운반하는) 속에 넣고 자기를 받아 줄 어떤 아뜰리에를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냥 ‘아뜰리에’라고 하지만 누구의 아뜰리에, 즉 교수이름이 아뜰리에의 이름 입니다. 미술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누구 아뜰리에에 다니느냐고 누구나 묻는데 그 대답으로 그 학생의 작품경향과 수준을 점 치게 됩니다.

받아 드려진 아뜰리에서 정 견디지 못하면 아뜰리에를 바꿀 수 있으나 대개는 그 선생밑에서 학교를 떠날 때까지 머물며 배우고, 사제지간의 정을 돈독하게 합니다. 이래서 누가 누구의 제자로 탄생 됩니다.

미술학교의 주춧돌이랄까하는 기본은 데생교실 입니다. 교수는 작품성에 대해서만 관여할 뿐이어서 데셍 실력이 모자라면 데생교실에 가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사실 화가는 일생 이 데생 연습이랄까 크로키연습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나는 모든 조형미술의 시작은 데생 즉 에스끼스, 이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는 갈 길이 막막하였거나 답답할 때면 이 데생실 문을 열고 들어가 모두가 분주히 그려대는 열기에 찬 분위기 속에 휩싸이기를 좋아했습니다.

더 보태야 할 말은, 데생은 그 옛날처럼 있는 그대로 그려야만 되는 수업이 아닙니다. 이 고색 창연한 데생교실은 학교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줄곳 모델(누드모델)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데생교실은 변하지 않고 열려 있을 것으로 압니다.

데생 지도교수들이 가끔 교대로 와서 데생을 지도하는데, 지독한 간섭(그려주는 간섭)은 물론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노련한 모델들은 직업의식이 대단하며 학생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오히려 학생들을 지치지 않도록 리드하고 있습니다.

아뜰리에 수업과 데생연습(수업)은 학교성적과는 상관없이 졸업 때 까지 진행 됩니다. 교수는 일주일에 한번만 나오기 때문에 그 날은 그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교수에게 보여주고 품평을 받는 날이지만 일년 내내 보여주지 않아도 그만 이었습니다.

이외에 해부학, 재료학, 유화기법, 미술사 같은 교실강의를 듣고 따삐스리, 모자이크, 프레스코기법을 선택과목으로하여 차례대로 돌아가며 배웁니다. 이렇게 4년 다닌 후 수업을 이수한 시험성적과 졸업작품에 대한 교수의 품평허락으로 수료증인 ‘디플롬’을 받고 졸업 하게됩니다.

미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한쪽은 졸업장을 가지고 졸업하여 학교선생이 되려는 학생이고, 다른 한쪽은 전업화가가 되려는 학생, 즉 졸업장을 원하지 않는 학생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초중등학교의 미술선생을 미술선생이라고 하지않고 데생선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엔 미술시간이 없습니다. 전업화가가 되려는 학생들은 졸업하지 않고 자유학생이라는 자격으로 학교시설을 계속해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 두 사람의 한국학생(기성 화가 신분의)이 미술학교시험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합격하고 한 사람은 합격을 못했습니다. 교포사회에서 수군대기를, 두 사람은 다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왔는데 불합격된 사람은 작품활동을 서울에서 활발히 했다는 화가인데도 떨어졌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포사회가 잘 모르고 하는 말들 입니다. 학교측에서 볼 때, 합격시킨 사람은 학교에 다니며 더 배울 필요가 있다고 판정한 것이며, 합격시키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학교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입니다. 그때 부터 이렇게 십입생을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법과대학을 중퇴한 뽈 세잔느가 파리에 올라와 두 번씩이나 입학시험을 쳤다가 재주가 없는 녀석이라고 낙방을 시켜 실망 속에 낙향하게 했던 그 학교가 바로 파리고등미술학교였으니 시대가 변하면서 입시제도도 바뀌어 가고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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