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먹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477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2.02. 18: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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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8

S 형,

2002년을 다 소비하고 며칠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빠른 세월을 오래 전부터 체념해서인지 다소 느리기도 합니다. 더 느렸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빨리 현재형으로 하고 싶은데, 아직도 1960년대를 맴돌고 있습니다.

1961년, 나는 전국각지에서 모인 예비 화가들과 S미술대학에서 만났습니다. 회화과 학생은 40명이었는데 나중에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로 나누게 되어 나는 동양화를 할 것인지 서양화를 할 것인지를 택해야 했습니다. 나는 별로 생각할 것도 없이 선뜻 서양화과를 선택했습니다. 40명중 15명 정도가 동양화과를 택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붓과 벼루는 어느 집에나 있었으니 당시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과 붓으로 글씨를 써 보았을 것 입니다. 그 것은 특별히 신비한 도구가 아니라 연필과 만년필이 없던 시절 우리의 필기도구 였습니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펜으로 쓴 흘림체 불어글씨를 보면서 로마글자체를 이렇게 아름답게 써 낼 수가 있다니 하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초서체에 버금가도록 읽기 어려우면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어쩌다 굵은 펜 촉으로 쓴 프랑스 친구의 카드나 편지를 받으면 그 글씨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서양사람도 글씨를 쓸 때 먹(잉크)의 농담을 잘 터득하여 멋을 부렸습니다. 렘브란트의 잉크 데생을 볼 때도 그가 얼마나 먹의 농담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시 아이들에게 먹과 붓을 쓸 줄 알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중국화가가 프랑스에 왔을 때 마티스와 피카소와 더불어 환담을 하며 같은 자리에서 서로의 재주를 발휘하여 데생을 했습니다. 이 두 서양의 거장은 흐느적 거리는 붓으로 자기네 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게 그려내는 중국화가의 솜씨에 놀라서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했습니다.

전에 나는 모래색갈 콜리 종 개를 길렀는데 그 개는 털이 길어서 자주 빗 질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한번은 털에도 무슨 감각이 있을까 시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개가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을 때 털 한 오라기를 모기가 스쳐 가듯이 살짝 건드려 보았더니 그 부위의 근육을 떠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몇 번 더 스치니 그 개는 눈을 떳습니다. 그 예민한 반응이 놀라워서 ‘그럼 내 머리카락은 어떨까’하고 머리 한 올을 살짝 건드려 보고는 ‘나도 마찬가지구나’ 하고 바보같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동양화가는 이와같이 붓끝에 있는 털 한개의 감각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는 초등 학교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습자시간이 있어서 붓과 먹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에는 먹과 붓을 더 이상 써 본적이 없다가 미술대학 1학년 때 동양화 수업과 서예 수업시간에 잠깐 붓을 만져 본 것이 전부 였습니다.

청소년시절 학교에서 서예를 못 해 본 것은 참 안타까운 일 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어렸을 때 익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는 동양화를 더 배웠어야 했는데 못했다는 후회를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워밍-업 삼아 간단한 데생이나 크로키를 인디언 잉크와 수채화 붓으로 꾸준히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막연하게나마, 얇아 찢어질 것 같은 습자지와 날아 갈 것 같은 화선지의 촉감, 청결한 먹 향기, 먹물을 듬뿍 머금어 흐느적거리는 붓,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의 강도, 손의 연장인 붓대, 이 모든 것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의 고향을 찾은 것 같은 정다움과 평온함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침침한 박물관의 두꺼운 유리창 뒷편에 있는 동양화를 어려서 보았을 때 나는 왜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 것은 내가 느끼고 있던 동양화 재료의 감각을 거기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며, 여백이 받쳐주고 있는 동양화의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기 때문이었을 것 입니다.

동양화는 어른 거리는 유리창을 통하여 인공조명 밑에서 보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동양화의 재료는 자연과 매우 일치하는 재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동양그림과 사람 사이를 유리가 가로막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 입니다. 그 그림은 자연의 숨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미이라처럼 생명을 잃은 것으로 내 눈에 비쳐졌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동양화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자신 있게 가르칠 선생을 못 만난 탓에 제대로 배우지 못 했거나, 마땅한 안내서를 만나지도 못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당시의 세태가 동양화를 낮추어 보고 고리타분한 분야라고 여겼기에 나도 무의식 중에 그렇게 세뇌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나 자신이 물밀 듯 몰려오는 서양의 물결에 도취하여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으며, 나라가 뒤지게 된 모든 책임을 옛 것과 우리 것에 전가하던 사회풍조에 휩싸여 우리의 전통적인 그림까지 업신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양화와 서예는 해석하고 분석해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 본다는 잘못 된 선입견 때문이었다면 뜻을 모르고 그대로 본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서양화를 그리는 선배들이 말 하듯, 동양화는 방안에 편안히 앉아서 그야말로 신선 놀음 하듯이 좋고 그럴 듯 한 것만 상상해서, 아니면 옛 것을 그대로 베껴서 조합하는 비현실적, 비생산적, 비사실적, 비상식적인 그림이라고 한껏 격을 낮춘 얘기들을 주워 듣고서 ‘그런 허무맹랑한 그림 세계로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가당치도 않은 잘못된 많은 생각들이 나를 더욱 서양화를 하도록 떠밀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화집의 작품설명을 이해하고 그림을 읽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나름대로 이러쿵저러쿵 평까지 하면서도, 가까운 박물관에 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직접 볼 수 있었던 동양화나 서예 등 우리의 문화유산을 원작 앞에서 분석해서 이해하는 감상다운 감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서양화과를 무조건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색채사용이 제한 된 동양화보다는 그 사용이 자유분방하다고 여기고 그려온 서양화를 더 좋아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재주가 조금 있고 색채를 좋아한다는 것이 서양화를 공부하는 ‘완전조건’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입니다.

이 너무도 순진하고 단순한 동기에서 택한 서양화 공부는 동양적인 영감을 끄집어 내야 할 바탕이 점점 고갈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를 끊임없는 방황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최대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한참동안이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대학과정 4년 동안 회화과가 둘로 나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동양화수업도 하고 서양화수업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말하자면 동양화와 서양화 간의 벽을 쌓지 않고 ‘통 털어 회화’라고만 생각하게 했더라면 나는 한국의 문화전통 위에 우뚝 선 화가로서 동양화의 미학(전통)과 서양화의 형식(재료)을 잘 배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나름대로 한국문화가 잉태된 개성 있는 작업을 하는데 더 큰 도움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동서 양쪽을 잘 배합할 수 있었던 시간을 더 많이 가졌더라면 나는 양편의 좋은 요소를 둘 다 소화해서 소유함으로써 서양의 화가들이 못 가진 동양적인 영감, 즉 동양적인 요소를 표출할 능력을 바탕으로 나만의 독창성을 더 일찍, 그리고 더 확연하게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학창시절의 철 없는 서양화과 학생들은 무료한 시간에 벤치나 잔디밭에 앉아서 동양화가들은 삿갓에 두루마기를 입고 그림을 그려야 하지만 우리는 김치나 밥을 먹는 대신 버터와 빵을 먹으며 작업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엉터리 생각을 주고 받았습니다. 모두가 한국인의 탈을 벗고 얼른 서양인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큰 오산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우리 옛 문화의 자취를 보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서 우리의 정신적 유산이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했어야 옳았습니다. 젊어서 보다 철저한 탐구로 정신적인 무장을 갖추어야만 화가로서의 장래가 있다는 것을 당시의 우리는 모르고 싶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옛 문화가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이해를 못했다면 그대로 모사하는 연습이라도 열심히 했어야 했습니다. 뜻 모르는 어려운 문장이라도 자꾸만 반복해 읽으면 마침내 이해에 도달하는 기쁨을 얻는 것처럼 말입니다. 프랑스의 젊은 화가들이 로마를 꼭 거쳐야 하고, 진이 빠지도록 수도 없이 옛 그림을 복사해야 하는 수련과정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몰랐거나, 알았어도 그것을 ‘다 옛날 이야기’라고 몰아 부치는 무지의 탓 이었을지 모릅니다.

프랑스 젊은이들은 자진해서 로마간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그들만의 예술정책에 따라 17세기부터 젊은 미술학도들을 국비로 로마에 보내 그곳의 그림을 복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정책이 우리에겐 있을 리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한 선각자적인 선배와 스승은 있었어야 했습니다.

서양화가가 되려는 급한 희망 만큼이나 빠르게 나 자신의 뿌리를 송두리 채 뽑아 버리고 모든 의문과 정답은 서양에서 찾으려고 헤메기 시작하는 잘못을 나는 대학시절부터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서양화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면서도 그 필연은 애매해지기 시작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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