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주지 못한 작품들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4957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1.25. 23: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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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6

S 형,

프랑스로 떠날 수속을 밟던 해 1971년, 나는 한가지 해결을 못한 일 때문에 속이 몹시 상해 있었습니다.

70년 가을에 있었던 중고교동문 미술가 전시회를 끝낸 후 동문들이 출품해 준 작품들을 작가들에게 되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S중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난후 프랑스어를 배우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다시 다니고 있을 무렵, 개교 기념행사의 하나로 미술반과 조각반 출신 미술가들의 총동문전람회를 처음으로 개최하는데 있어 그 전람회를 준비하고 주관해 달라는 요청을 모교 동창회에서 나에게 요청해 왔습니다.

내가 다닌 K중고등학교는 최초의 관립중등학교로 구한말인 1900년10월3일에 한성중학교 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일제침략식민지시대를 거치며 여러번 교명을 바꾸며 장차 우리나라의 동량이 될 수많은 수재들을 길러내면서1970년 개교 70주년을 맞았습니다.

모교동창회 행사를 도와 달라는 일이라 사양하기도 어려웠지만 그것은 나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또한 나의 청소년기를 불태운 정들고 아름답던 미술반활동을 기쁘게 회상할 수 있는 기회여서 기꺼이 그 준비와 진행을 맡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선후배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작품을 출품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시간도 참 많이 걸리고 예상외로 번거로웠습니다.

우리학교 미술반은 활발한 전통을 이으며 해마다 가을이면 교내전을 열었는데 교내에서 하기도 했지만 교내 밖에서도 할 때가 있어서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에 있던 동화화랑과 지금은 없어진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내의 화신화랑에서 열었었습니다. 그때 당시 서울시내에 화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시장은 백화점내 이 두곳뿐이었으며 중고등학교 미술반이 이렇게 시내의 화랑에 나가서 발표전을 여는 것은 참 드문일 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여는 개교기념 전체 동문미술가 전람회는 갓 신축된 광교에 있는 조흥은행본점 2층 넓은 홀로 정해 졌습니다. 홀에 칸막이를 세우며 본격적인 전시장 답게 꾸며졌는데 신축된 은행건물엔 우리나라 최초의 에스칼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전시장은 제법 넓고 너른 유리창으로 환 했습니다.

이 조흥은행본점 빌딩은 모교 출신 건축가가 설계를 했으며, 모교출신 간부가 은행에 다수 있어서 전시회 장소는 아닌 단지 은행의 중심 홀 이었지만 그 동창생들은 자기들 모교의 행사를 위해서 특별히 전시장으로 꾸미고 임대료도 없이빌려 주었습니다. 전시회 기간은 학교개교기념일에 맞춘10월 초순 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시장소와 기간이 잡혀지고 20여명의 미술반 선후배들이 출품요청에 기쁘게 응해 주어서 개교 70주년을 기리는 뜻 깊은 전시회가 개최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미술반 활동을 활발히 했으나 부모님들의 반대로 미술대학에 가지 못한 동문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화단에 나가 활동하는 미술가로서의 졸업생수는 적은 편 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된 학교라 전체로 보면 출품자수가 제법 많다고 할 수 있어서 모교 미술반과 조각반의 빛나는 전통을 과시하기에 좋은 전시회 였습니다. 학교와 동창회에서 이런 학예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한 인문중고등학교가 학생들을 공부벌레로만 키우지 않고 예술가 자질도 키웠었다는 자랑된 역사를 과시하기 위함 이었겠습니다.

이렇게 자랑의 모양을 잘 갖추어서 뜻 깊은 전시회를 성대하게 치룬 후에 작품을 출품자들에게 돌려 주어야 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창회 임원이기도 한 모교 S 교장선생이 작품을 작가들에게 돌려주지 않으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 뜻이 애초에 있었었다면 출품을 의뢰를 할 때 ‘출품작은 모교 동창회에 기증하는 것’ 이라는 조건을 달면서 요청 했어야 옳았습니다.

전시회가 끝나자, S교장은 전시회주관자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출품작을 옮겨다 어느새인지 학교 구석진 교실에 넣어 놓고는 자물쇠로 잠가 놓았습니다. 작품을 돌려주려는 나는 서무과에 가서 열쇠를 찾았더니 열쇠는 교장선생이 가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열쇠를 찾으러 교장실에 들어간 나를 S교장이 어떻게나 어리게 보았던지 전람회를 하느라 비용을 많이 썼다면서 작품들을 팔아서 그 비용을 충당해 놓아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책상 설합에서 동창회 유지들 명단 리스트를 꺼내 주며 명단의 유지들을 찾아 다니며 작품을 팔아 오라고 명령하듯 당당하게 멀쩡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 동안 망연자실해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어 차린 다음 나는 그런 일은 못한다며 교장실을 밖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 교장은 동문전람회를 준비하고 종료하느라 수고했다는 치사대신에 마침내는 나에게 외판원으로서 그림을 팔러 다니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나는 교장실을 나오면서 몰아치는 수치감 때문에 몸을 떨었습니다.

S 교장이 말하는 전람회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이었습니다. 전시장 장소 임대료를 낸 것도 아니고, 팜플렛을 돈 들여 만든 것도 아니며 나에게 사례를 준 것도 아니었으니 전람회를 위해서 쓴 비용은 전혀 없었고 동창회를 정말 빛나게만 한 행사 였습니다.

동문회전람회라는 미명아래 동문미술가들의 소중한 작품들이 졸지에 압수를 당했고 작가의 허락도 필요없이 무단으로 어디론가 팔려 버릴 처지에 놓인 것 입니다. 출품자 중에 그럭저럭 작품을 파는 작가는 단 한 명 뿐이고 나머지 작가는 모두 작품으로는 배고픈 작가들 이었습니다.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돌려주지 않고 팔아서 동창회에서 쓸 돈을 만들 겠다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몰상식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애매한 유지동창들을 찾아가서 구걸하듯 하라는 명령을 어떻게 내게 내릴 수 있었을까요 ?

생각다 못한 나는 안되겠어서 얼마 후 다시 S 교장을 찾아 갔습니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돌아가신 P선배 작품은 미망인께 전시회가 끝나면 꼭 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하고서 빌려 온 것이니 그 작품은 내 손으로 반드시 돌려 드려야 한다고 버텼습니다. 여러 시간을 버티며 안말않고 기다리고 기다리니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P선배작품을 꺼내다 주었습니다. 내가 가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P선배가 그 교장이 가볍게 볼 수없는 교장보다 더 선배였기 때문이었을 것 입니다.

그 P선배는 바로 내가 몇 년 동안 붓을 줄곧 빨아 준 고등학교때의 그 미술선생 이었습니다. 나는 미술반 선배들에게 교장의 옳지 못한 처사를 호소했지만 선배들은 아무 의견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작품을 되찾을 생각도 안했습니다. 나는 그 후 이 작품들이 어떻게 됐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고 있으며, 선배들도 그것을 똑바로 알아 낸 사람이 없습니다.

동창회의 선후배 관계라는 것이 이처럼 선배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대꾸조차 못하는, 완고하고 무서운 관계라는 것을 그때 다시한번 너무나 잘 알게 됐습니다. 그 교장선생은 대선배라는 입장에서 한 참 후배인 나를 마구잡이로 얕잡아 본 것 입니다. 당시의 나를 이미 사회에 나가서 이런 저런 쓰라린 경험을 쌓고 있는 사회인으로서의 후배로 어여삐 생각하지 않았고 몰상식한 교장의 눈에는 내가 만만했던 학생시절의 새카만 제자로만 보였던 것 입니다. 더구나 나는 K중학교가 1966년 학교 평준화 방침에 희생되어 불명예스럽게 폐교되어 고등학교만 남게됐을 때 2년간 중학교 미술강사를 맡아 임시교사로서 봉사 했었습니다.

불의에 대항하는 청년이였고 창작에 대한 열정의 눈길이 맹렬한 화가인생 초년생에게 그림을 팔러 다니라는 것은 엄청난 모욕 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그 일 때문에 얼마나 약이 오르고 분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멸시 받은 것이 더욱 슬펐던 것은 그 때 내 나이가 이미 만29살이나 됐었고, 그 나이는 으젠느 들라크로아가 대작 ‘시오의 학살’ 을 그려서 낭만주의화풍를 선언했던 때로 부터 무려 4년이나 더 지난 나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의식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S 교장은 선후배 학생들간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선생이었고, 우리에게 사회에 나가서 올바른 시민이 되라는 과목인 공민을 가르친 법대출신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일을 그에게서 그렇게 당하고서는 나는 그를 이중인격자로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후 나는 파리에서 두번이나, 여행 중인 S 교장을 만났는데 그는 그 때의 잘못된 출품작 처리문제에 대하여 한마디 언급도 없었습니다. 나로서도 지금에 와서 이역만리 떨어진 파리에서 그 것을 다시 묻다니, 그렇다, 다시 꺼내 묻지도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입밖에 절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그 S교장과의 나쁜 인연은 고3때에도 있었습니다. 인기를 한참 누렸던 그 S교장은 그때 3학년 학년주임선생 이었습니다.

대학진학을 준비하던 겨울철, 미술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은 모두 6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우리는 실기시험과목인 인체모델을 써서 데셍연습을 해야 했는데 학교 뒷동산 난방시설이 없는 미술반 교실에서는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친구인 P가 자기네 방송반실 옆 학교본관 아래층에 비어있는 작은 방이 있다고 귀띔을 해줘서, 우리 미술대학 지원자들이 인체모델을 쓸 2주일 동안만 스팀이 들어오는 그 작은 교실을 사용하겠다는 허락을 학교에서 받아 냈습니다.

교실의 4분의 1크기의 장소는 넓지 못하여 모델과의 거리를 충분히 띄어 놓고 데생연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따듯해서 모두가 좋아하면서 열심히 인체데생으로 입시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번 했을까, 며칠 후 데생실 문을 여니 우리들의 이젤과 화판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난데없는 선생님들 책상과 의자로 꽉 들어찬 작은 교무실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락 날락거리는 빈방을 눈여겨 본 교무실 연구부 주임선생은 이 방을 탐내어 독립된 연구부 교무실로 쓰겠다고 연구부 직원 선생을 데리고 감쪽같이 하루아침에 이사해 와 차지된 것 이었습니다. 우리들 여섯명의 미술대학 지원자들은 곧바로 서무실로 모두 달려가 그것을 항의를 했고 옮겨져왔던 연구부 선생들 책상은그 날 아침으로 당장 다시 본래의 자리 교무실로 쫓겨 갔습니다.

우리는 그 작은방에서 입시준비를 하여 6명의 지원자중에서 4명이 그해에 미술대학에 입학 했습니다. 그 때의 연구부주임 선생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고 3학년 학년주임선생 이면서, 바로 가난한 미술가 동문들의 작품을 돌려주지 않은 그 S 교장선생 이었습니다.

나는 이와같은 나쁜 기억때문에 그로부터 30년후 2000년에 열린 개교 100주년기념 미술반-조각반 두번째 총동문전람회에 작품출품을 요청받고서 나 혼자 단호히 이를 거부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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