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나들이"를 쓰고 나서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128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6.24. 10: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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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나들이"를 쓰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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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28

우리 다섯친구중 승삼은 여행이 끝나 갈 때까지 아호(雅號)를 정하지 못했다.

프로방스에 오기전 우재와 지명은 이미 柏田과 朝安이라는 아호를 지니고 있었고, 여행중에 경순은 美羅麻로 나는 周仁이라는 아호를 찾았다.

절벽위의 중세마을 꼬르니용-꽁푸를 내려올 때 그 마을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 공후 ≫라고 부르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승삼은 그 아호를 석연치 않게 여겼다.

그러면 ≪ 공후 ≫에서 ≪ 공 ≫, 자주 늑장을 부린다고 해서 ≪ 지(遲) ≫, ≪ 지공(遲公) ≫이라고 짓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것도 마다하고 자기 아호를 난데없이 ≪ 제르몽 ≫이라고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들 한차례 웃었다.

≪ 라 트라비아타 ≫에서, 갓 행복해진 ≪ 비올렛타 ≫에게 찾아 와서 아들과의 관계를 끊어 달라고 간청한 후, 아들을 달래는 노래 ≪ 프로벤쟈(프로방스)의 땅과 바다를 잊었더란 말이냐? ≫를 부르는 ≪ 알프레도 ≫의 아버지 ≪ 지오르지오 제르몽(Giorgio Germont) ≫의 이름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 제르몽 ≫이 자기는 좋단다.

스믈 세살의 비올렛타가 임종할 순간까지 읽고 또 읽어서 다 달아빠진 謝過편지를 쓴 제르몽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알프레도의 고향이 프로방스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遲公이 아호로 싫다면 ≪ 之空 ≫이 어떻겠느냐는 案이 나와서 다수결로 채택해 버렸는데, 승삼은 서울에 돌아 가서야 공식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프로방스 나들이가 몇 편 나가니까 之空이 우리들만이 아는 旅行談으로 쓰지말고, 그곳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는 글로 쓰면 많은 사람이 읽어서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해 왔다.

그런 之空의 충고대로 여행하고 싶은 충동을 주면서 여행길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자 했으나 의도와는 달리 재미없고 지루한 사설이 된 것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풀어 본 이야기에는 사실 거의 쓸모없는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천년 전 중세마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보려 했으나 수박 겉핥기식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런 拙文을 半年동안이나 참고 읽어 주신 분들이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그렇지만 이 여행을 기록해 보려는 마음이 생긴 것은 잊고 싶지 않아도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점점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희미해지는 추억들을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언제든 다시 읽기만 하면 그때 그 순간이 생생하게 되 살아 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엔 약 여섯편 쯤이면 다 써질 것 같았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간 친구들에게 여행기를 여섯편쯤으로 써 볼련다 하면서, 그것을 내가 써도 괜찮을까하고 묻는 이메일을 띄웠다.

친구 넷은 각자 관찰력과 문장력에서 나보다 더 섬세하고 월등할 것이 분명한데도, 한글文體에 약하기만 한 내가 쓰겠다고 나서는 것이 우스워서 였다.

친구들은 착착 답장해 오기를, 내가 써 본다니 잘 됐다면서 버리지 않고 있던 유적과 미술관 입장권, 상점에서 받은 티켓, 음식이름이 적힌 식당영수증등등을 모두 뒤져 내서, 각자가 특별히 즐겼던 일들을 적은 메모와 함께 보내면서 글 쓰는데 참고하려면 하라고 했다.

더군다나, 柏田은 곳곳을 부지런히 찍은 600여장의 사진들을 CD에 담아 보내 주었고 나는 그사진을 글쓰는 동안 보고 또 보며 기억을 되 살려 냈다.

같이 여행한 친구들 중에는 세상이 알아 주는 쟁쟁한 文章家도 있었고 어느 누구라도 여행기를 쓸 마음만 먹기만 하면 좋은 여행기를 남길 수 있었음을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떠나는 첫날 파리 지하철에서 ≪ 들치기 사건 ≫을 당한 후 TGV속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 한병씩을 들이키며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少時에 희곡을 썼던 之空은 그것을 劇本(씨나리오)으로 써서 남겨야 한다고 했고 모두가 웃으며 동의했었다.

아비뇽에서 교황청 꾸르도너르의 어수선한 가설무대와 객석사이를 지나갈 때 , 누군가 之空의 작품 ≪ 파리 지하철 들치기 사건 ≫을 여기서 공연하자고 했다.

그토록 정확히 희곡 집필자까지 之空으로 정해 졌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기를 굳이 도맡아 써 보고 싶었던 것은 나의 拙文들이 올려져 있는 ≪ 오천룡의 그림이야기 ≫에 덧 붙혀 연재하고자 해서 였다.

나는 우리가 다닌 고장과 인연이 깊은 화가들을 벌써 머리에 떠 올려 놓았고, 더구나 프로방스는 나의 첫번째 졸문중에 하나인 ≪ 서러운 후기인상파의 밤 ≫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柏田이 나에게 Web Site www.from60.com 에 특별히 마련해준 지정석 ≪ 오천룡의 그림이야기 ≫에는 100% 그림이야기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따분할 수도 있고 독선적일 수도 있는, 나의 미술체험에서 끌어 낸 미학관을 말하는 글이 아니고 미술가의 삶에 동반했던 모든 기억의 편린을 두서없이 적은 글들이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개인적 느낌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 프로방스의 風物을 대하면서 던진 귀중한 코멘트와 반응을 되도록 놓치지 않고 기록해 보자는 것도 있었다.

柏田의 강력한 희망으로 이번 여행이 성립됐지만,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풍물을 만나 모두가 감탄할 때 마다 柏田은 짐짓 ≪ 글쎄, 여기에 누가 오자고 그랬어 !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프로방스에 대한 우리들의 애정과 찬사를 그대로 대변한 말이었던 것이다.

파리로 돌아온 날 밤, 밤은 늦었지만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 친구들과 함께 화려한 샹제리제로 나가서 惜別宴을 가졌다.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 까지 먹고 마신 우리들은 택시를 타기 보다는 밤의 파리를 걸었다.

황금 빛 조명을 안고 서 있는 에펠탑이 우리의 길잡이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시간마다 한번씩 하고 있는 ≪ 빤짝 전등 쇼 ≫를 시작했다. 에펠탑 철골을 따라 설치된 수많은 섬광등(閃光燈)이 어지럽게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며 탑의 형태를 완전히 감싸고 돌면서 눈부신 빛을 사방에 분사하여 보는 이를 황홀하게 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다리 아픈 것도 잊고 센느강을 건너 에펠탑 공원을 지나 호텔이 있는 깡브론느까지 내쳐 걸었다.

환한 개선문을 등뒤로 하고 꽁꼬르드 광장을 향해 샹제리제를 내려가서, 왼쪽으로 꺽긴 ≪ 아브뉴 몽떼뉴(Avenue Montaigne) ≫로 해서, 쎄느江 ≪ 뽕 드리에나(Pont de l’Iena) ≫ 다리를 건너서 原始미술관을 짓고 있는 ≪ 께 브랑리(Quai Branly) ≫강변길로, 그리고 에펠탑이 서 있는 ≪ 샹 드마르스(Champs de Mars) ≫ 공원, ≪ 에꼴 밀리떼르(Ecole militaire) ≫ 육군사관학교앞, 최승언교수와 저녁을 먹던 쉬프렝(Suffren)식당앞을 지나 ≪ 뤼 뒤라오스(rue du Laos) ≫골목길로 해서 ≪ 쁠라스 깡브론느(Place Cambronne) ≫ 광장.

서울에 도착한 친구들이 나의 인터넷 편지함에 넣어 논 두개의 이메일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은 없었다 ≫

≪ 프로방스에 한번 더 가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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