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나들이 14 - 플라타나스의 고장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166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6.01. 09:52:18
첨부파일  
프로방스 나들이 14 - 플라타나스의 고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3-11-02

우리는 반 고호의 <밤의 까페> 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낸 후 ≪ 레잘리스깡 ≫을 보러 갔다.

레잘리스깡은 ≪ 갈로-로망 ≫의 유적지다. 고대 로마의 영향을 입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민족인 ≪ 골 ≫족을 ≪ 갈로-로망 ≫이라고 한다.

그 곳엔 반 고호가 그림을 그린 현장이 있기도 하다.

아를르 시내에는 중세가 그대로 보존된 골목길이 많이 남아있다. 골목길에는 쌍기둥 창문과 세로로 줄이 파인 기둥이 도드라져 나온 벽을 한 의젓한 저택들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 모양들을 눈 여겨 보느라 골목길을 쉽게 빠져 나오지 못했다.

활짝 열어 제친 덧문들은 대부분 짙은 라벤더 색이었는데 더러는 노랑색으로 칠해 놓아서 별나게 보였다. ≪ 밤의 까페 ≫에서 이미 노랑색 벽을 본 다음이라서인지 그 노랑색 덧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것도 역시 반 고호의 위력이 아닐까 ?

이런 저런 구경끝에 골목을 겨우 나와 널찍한 테라스의 까페가 즐비한 ≪ 불르바르 데 리스 ≫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아를르에서 가장 넓은 이 대로엔 거대한 프라타나스가 뜨거운 햇빛을 차단하면서 넓은그늘을 보도에 시원히 펼쳐 놓았다. 가로수로 치자면 ≪ 마로니에 ≫는 파리고 플라타나스는 단연 프로방스 였다.

프랑스에서는 도시의 길을 구별할 때 가로수가 있는 넓은 길은 ≪ 아브뉴 데 샹젤리제 ≫처럼 ≪ 아브뉴 ≫ 혹은 ≪ 불르바르 ≫라고 부르고 가로수가 없는 보통 길은 ≪ 뤼 드 센느 ≫처럼 ≪ 뤼 ≫라고 부른다.

프로방스의 플라타나스들은 그 크기도 엄청나거니와 모양이 아주 특이하다.

나의 느낌으로는 살밖에 없는 우산을 꺼꾸로 뒤집어 하늘로 향해 꽂아 놓은 듯 하다. 잎들이 다 떨어져 버린 겨울철에는 아마도 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미끈한 플라타나스는 일정한 높이 까지는 쭉 뻗어 올라간 후에 가지를 L자로 꺾어서 팔을 똑바로 치켜 들고 벌을 서듯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나무 모양을 그렇게 바로잡기 위해서는 전지할 때마다 대단한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손을 높이 처들어 올린 굵은 가지들은 중간에 옆으로 자란 잔가지들이 없고 듬성듬성 잎이 달려있을 뿐인데 그래서 그런지 잎들이 한결같이 큼직하고 튼튼했다.

숨통을 열어주듯 창공에 틈틈이 뚫린 잎사귀 무리들 사이로 한낮의 태양이 땅바닥에 얼룩져 내려 꽂힌 빛과 그늘이 어른거리며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수시로 불어대는 강력한 미스트랄에 견디게 하느라면 나무의 저항을 한껏 줄여야 했을 것이고 그래서 잔가지를 철저하게 속아 냈을 것이다.

플라타나스 대로를 걷고 건너고 돌아서 우리는 레자리스깡에 도착했다.

유적지 안뜰에도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프라타나스가 장관이었다.

나무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양 일정한 간격으로 줄 서있고 그 위의 선록색 천정은 역광을 받아 찬란했고 땅바닥은 회색 그림자가 얼룩져 있었다.

이 숨쉬는 나무궁전은 우리를 압도했다. 갑자기 햇빛 쨍쨍한 한낮의 매미 울음소리가 입체음향으로 귀를 찌른다.

≪ 샹젤리제 ≫라는 뜻을 가진 ≪ 아리스깡(Les Alyscamps) ≫유적지 초입에 있었던 상점과 공동목욕탕 등 민가의 동네는 3세기때 파괴됐다고 한다.

지금 이 유적지에는 중세때까지의 공동묘지와 중세이후 기독교인들의 묘지인 지하묘지 부분만 남아 있다. 알리스깡의 묘지형태는 서양 공동묘지의 모델로서 유명하다.

묘지입구에서 시작되는 ≪석관이 있는 大路 ≫로 불리우는 긴 도로의 양편에는 석관들이 연이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로마시대부터 중세 때까지 모두 80세대에 걸쳐 만들어진 석관들이다.

세모꼴 모양의 뚜껑에 관의 네 귀퉁이에 발이 달린 석관은 그리스식 석관이고, 평평한 뚜껑에 발이 없는 것은 로마식 석관이다.

이 석관길에서 한 때 반 고호와 고갱은 사이 좋게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이 심한 불화 끝에 헤어지기 한달 전에 흰 캔버스를 옆구리에 끼고 이곳에 왔었다.

그때 반 고호가 그렸던 장소에는 그가 그린 그림의 사진판을 전시해 놓았고 사진 밑에는 반 고호가 동생 떼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을 설명한 부분이 새겨져 있다.

≪ … 낙엽이 지금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을 네가 좋아 했으면 한다. 나무잎들이 달려 있는 나무꼭대기 부분이 화면에서 짤려 나가서 그냥 푸르 죽죽하기만 한 색으로 보이는 말뚝같은 기둥들은 실은 포플라 나무들이다. 연보라빛의 고대 석관들이 오른쪽과 왼쪽에 쭉 늘어서 있는 석관길가 양편에 포플라는 말뚝처럼 줄 서있는 것이다. 그런중에 땅위엔 낙엽되여 벌써 무수히 떨어진 오렌지색, 노랑색잎들이 쌓여서 마치 땅위에 푹신한 ≪ 따삐(양탄자) ≫를 깔아 놓은듯 하다. 함박눈꽃송이가 쏟아져 내리듯이 지금도 낙엽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있단다… ≫

자기 그림을 이해시키려는 구구절절이 애처롭다.

반아카데미즘 기치하의 인상주의 미술운동이후20세기초 미술의 방향이 어지러워 졌을 때, 미술의 새로운 진로를 암시한 화풍을 세운 세사람의 화가 세잔느, 반 고호 그리고 고갱은 일시적이나마 프로방스의 같은 하늘아래에 있었다.

엑상 프로방스와 아를르 사이는 불과100킬로미터 안팍의 거리였지만 세 무명의 화가가 한자리에서 만난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세잔느는 반 고호와 고갱의 존재를 아직 몰랐었을 것이다.

반 고호가 아를르에 내려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다섯살이었고 고갱은 마흔살, 세잔느는 마흔 아홉살이었다.

세사람의 공통점은, 세잔느의 경우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미술학교를 다니지 않은 그들이 각자 가고 있던 길을 버리고 뒤늦게 그림세계로 무모하게 뛰어든 미술모험가들이었다는 점이다.

세잔느는 일생을 프로방스에서 마쳤고, 반 고호는 2년동안 있었고 고갱은 고호의 초청으로 잠시 거쳐 갔을 뿐이다. 그들이 위대해져서 미술사에서 떠 오르자 그 이름 프로방스도 일약 전세계적으로 유명해 졌다.

후기인상파로 불리우는 이 외로운 세 화가는 그들의 화폭에, 남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상관 않고 프로방스를 영구불멸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Total : 76개 (page : 2/6)
처음 페이지 이전 페이지 1 2 3 4 5 6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