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나들이 13 - 반 고호의 밤의 카페에서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362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5.31. 15:3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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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나들이 13 - 반 고호의 밤의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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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5

염전을 보고 난 우리는 ≪ 바까레스 ≫호수가 있는 자연보호지역으로 들어가 지중해를 바라보러 해안가로 향했다.

점점 더 야생적인 풍경이 펼쳐지면서 쭉 뻗은 낡은 아스팔트 길가에 터널을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플라타나스에서 매미소리가 우렁찼다.

길 왼편으로 ≪ 마스 ≫라는 ≪ 프로방스의 전통적 농가 ≫가 나타났다.

≪마스 드 쌩 베르트랑 ≫이라고 간판을 달아 놓은 이 농가는 레스토랑과 여관업을 하면서 말과 자전거도 빌려주고 있었다.

길가 햇빛가리개 지붕만 있는 마구간의 흰말들은 우리를 보는지 마는지 구유통에 머리를 파묻고 여물을 먹는 놈과 우두커니 서 있는 놈, 그리고 벌을 받는지 땡볕에 내 놓아져 있는 놈이 있었다. 모두들 희멀겋게 잘 생겼는데 땡볕에서 뒷발질을 하는 흰말이 그 중 제일 잘 생겨 보였다.

우리는 속에 전시장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궁금증이 나서 마당을 지나 전시실로 끌려 들어갔다.

울긋불긋 여름 꽃들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 손질되지 않는 정원에는 빈터마다 고철 폐품을 이용해서 만든 철물 용접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검정황소를 비롯한 까마르그의 동물형상들은 녹슬어 버려진 것 처럼 보였지만 주변의 야생 식물들과 잘 어울려져 보였다.

헌 창고같은 건물에 들어서자 잠시 컴컴했던 전시장은 그야말로 난장판 같이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고 물건 사이사이에 그림과 조각 작품들이 멋대로 놓여있었다.

잡다한 고물을 파는 ≪ 브로깡뜨(그런 물건을 파는 사람) ≫집이다.

이렇게 어수선한 농가아닌 농가를 나와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염호와 석호가 여기저기 패어져 있고, 늪지대와 작은 모래언덕으로 점철되어 있는 ≪ 보뒤끄 ≫만에 닿았다.

그곳에서 4킬로미터 더 가면 까마득히 보이는 등대까지 가 볼 수 있었지만 우리가 빌린 자동차로는 포장이 안되고 곳곳에 웅덩이가 있는 그 길을 더 가는 것이 무리인지라 그만 차를 멈추었다.

넓고 낮은 해면 여기저기에는 갸날푼 실루엣의 홍학들이 떼를 지어 있었다.

갑자기 홍학 떼가 날아 오르면서 잠시 그림같이 잠잠하던 바다의 고요가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 소란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 한 쌍의 홍학이 외 다리로 서서 서로 목을 감고 비비 꼬꼬 있는 모양이 황홀했다.

잔잔하고 투명한 바닷물에 몸을 굽혀 손을 담가본다. 모래를 한웅쿰 집어 올려 보니 따스한 바닷물의 감촉과 짠 냄새가 코에 닿는다. 어렸을 때 놀던 황해바다의 아련한 옛추억이 되 살아난다.

노년의 우리는 바다와 하늘이 같은 색갈로 맞닿은 수평선을 응시하면서 모두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음이 분명했다.

해안을 떠나서 좁은 길 모퉁이를 돌아 나갈 때 문뜩 갈대밭 속에서 흰말 다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 궁둥이 마다 그들의 번호가 낙인 찍혀져 있었다. 말들은 우리를 보자 슬며시 갈대밭 뒤로 사라졌다.

≪ 까마르그의 흰말 ≫은 처음에 ≪ 쥬리어스 시저 ≫가 군마로 사육하도록 명령했고 나중엔 나폴레옹이 그의 유명한 기마부대의 말로 차출해다 썼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점심때도 되었기에 까마르그를 뒤로 하고 아를르로 향했다.

지금은 늪지대옆 내륙도시가 됐지만 아를르는 한때 바다로 통하는 항구였다.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요새도시로 발전했으며 기원전49년에는 로마가 점령했다.

아를르에 도착해서 어제 저녁 때 왔던 주차장에 갔더니 자리가 없었다.

아렌느 위쪽에 주차자리를 발견했는데 그곳을 경비중인 경찰에게 미심쩍어서 주차금지 구역인지 물어보니 주차할 수 있다고 했다.

주차후 동전을 넣고 주차요금 티켓을 뽑으려는데 주차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준 경찰이 오더니 당신들은 관광을 왔으니15분 동안의 기본요금 티켓만 뽑아 놓으면 된다고 선의의 참견을 해왔다.

친절하게도 경찰은 주차비를 조금만 내라고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는 프랑스도시의 모든 길거리 유로주차장은 주차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돼 있어서 저녁 7시까지 계속 주차할려면 2시간마다 새로운 티켓을 뽑아 차 앞유리창에 게시해 놓아야 한다. 경찰에게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해도 자기가 여기 계속 있으니까 염려말고 구경이나 잘 하란다.

프랑스가 베트남 피난민을 많이 받아 들여서 그런지 아를르엔 베트남식의 중국식당이 꽤 여럿이 있었다.

파리에서 ≪ 뻬르 라 셰즈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그 근처 챠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을때 ‘포’ 라는 ≪ 누들 수프(중국우동) ≫가 우리 입맛에 맞고 맛도 좋았기에 그 맛을 기대하며 중국식당엘 찾아 갔다.

그러나 식탁에 나온 것은 그런 세련된 우동이 아니고 라면에 불과했고 양도 작아서 ≪ 냄(베트남 만두) ≫과 ≪ 하까오(새우만두) ≫를 더 곁들여 시키지 않았더라면 모두들 배가 고플번 했다.

점심후 우리는 시인 ≪ 프레데릭 미스트랄 ≫ 동상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고 유명한 바 ≪ 바 드 로텔 노르 삐뉘스 ≫와 ≪ 꺄페 반 고호≫가 있는 ≪ 포럼 ≫광장으로 갔다.

우리는 반 고호의 그림 ≪ 꺄페 라뉘(밤의 꺄페) ≫의 테라스에 앉았다.

반 고호가 아를르에 도착한 그해 9월에 그린 꺄페 라뉘는 그로부터 1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해바라기 노랑색으로 벽을 칠한 까페모습은 그림에서 보던 그대로 였다.

반 고호는 이 까페를 그린후 자기 여동생 ≪ 윌헬민 ≫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 밤을 그렸지만 밤의 검정색이라곤 전혀 없는 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거기(꺄페와 하늘)엔 멋진 색갈들뿐인 군청색,보라색 그리고 초록색이 섞여 있을뿐이고 광장을 밝히는 조명은 또 엷은 유황색과 파란 레몬색으로 주변을 슬쩍 물들이고 있다. 이런 광장의 밤을 그리니 매우 즐거웠다. ≫

자기의 그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을 짐작하기 시작한 반 고호는 벌써부터 자기그림의 주제가 무었이고 어떻게 그렸는지의 설명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동생, 떼오나 윌헬민에게 세세히 알리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소박한 문장의 문학이면서 화가의 위대한 기록이었다.

우리는 내낮의 반 고호 테라스에서 ≪ 에스프레소 ≫를 한잔씩 마셨다.

나는 조안과 미라마의 초상과 낮잠 자는 지공을 스켓치북에 옮겼고, 백전은 사진을 찍으러 광장을 누비며 다녔다.

떠나기전 꺄페주인의 허가로 이층에 있는 수리중인 당구장을 볼 수 있었는데 반 고호가 그린 당구대가 옛모양 그대로 있었다.

우리가 앉았있던 광장 왼쪽면 비스듬이 조그만 ≪ 바 ≫로 유명한 ≪ 바 드 로텔 노르 삐뉘스 ≫가 보였다.

그곳은 프로방스의 명사들과 피카소, 쟝 꼭또, 쟝 지오노, 투우사 니므노 2세, 이브 몽땅이 드나들었다는 명소다.

두꺼운 망또를 왼손에 걸치고 정장을 한 프로방스의 대표적 시인 프레데릭 미스트랄이 먼 곳을 응시하며 광장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까마르그의 목동과 ≪ 크로 ≫지대 부농의 딸, 두사람의 엇갈린 사랑을 그린 서사시 ≪ 미레요(미레이으,1859) ≫를 써서 성공하게된 미스트랄은 사라져 가는 프로방스의 방언 ≪ 랑그 독 ≫으로 쓴 ≪ 펠리브리즈 ≫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공로로 190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자 그 상금으로 론느강가에 프로방스의 의식주에 관한 모든 고귀한 풍속을 총집결해서 소중히 보관한 박물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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