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나들이 10 - 레 보-드-프로방스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235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5.26. 17: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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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 나들이 10 - 레 보-드-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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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12

≪ 상 레미 ≫에서 알삐으산 속의 중세도시 ≪ 레 보-드-프로방스 ≫ 로 가는 27번 지방도로 주변에는 포도밭이 많았다.

이 보-드-프로방스 포도밭은 ≪ 론느 ≫강 하구지방에 있는 유명한 다섯개 포도주 산지 중 하나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 알퐁스 도데 ≫의 ≪ 풍차 방앗간 편지 ≫에서 유래한 ≪ 도데의 풍차 ≫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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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엄청난 가뭄과 더위는 라벤더등 이 지방 특작물밭을 황폐화 시켰지만 포도농사에는 더 없이 좋았다. 금년도 포도주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좋은 포도주 년도로 매겨 질 것이라고 해서 전국의 포도밭 농장주들이 아주 좋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햇볕에 잘 익고 있는 포도밭 사이 사이에는 흰 석회암이 많은 경사진 비탈에 키 작은 올리브나무 밭과 덤불 숲 뿐이다. 건조한 모양이 ≪ 그리스 ≫의 흰색 산악지대를 그대로 빼 닮았다.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 언덕 하나를 넘자 문득 아찔하게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나타났다.

밋밋한 산등에 빽빽이 있는 올리브나무와 관목 숲 위로 불쑥 솟아올라 오후 햇살에 역광을 받아 시커먼 그림자를 안고 있는 절벽은 마치 거대한 배가 좌초된 후에 썰물로 배 밑바닥까지 완전히 노출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천 길쯤 되는 절벽 위에는 무너진 성채의 잔해가 창공을 배경으로 괴물같이 걸터앉아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절벽의 위풍에 압도당한 우리는 길섶에 차를 세우고 그 풍경에 취한 듯 한참을 바라 보았다.

저 절벽 위에는 어여쁜 여인들을 거느리고 반쯤은 산적이고 반쯤은 ≪ 트루바두르(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싱인) ≫ 였던 영주들이 살았던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다.

이 성채는 11세기에 프로방스지방 곳곳에 세워진 절벽 위 성채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봉건적 지배력을 가진 영주가 군림했던 곳이다.

이 성채의 운명은 그 난공불락의 전설을 잘 알고 그것이 반란자들의 손에 들어갔을 때의 후환을 두려워한 루이 14세 때의 재상 ≪ 리쉬리으 ≫에 의해 1632년에 파괴되었다.

우리는 절벽 바로 밑 ≪ 지옥의 골짜기 ≫를 통과해서 가파른 길을 따라 꼭대기 주차장까지 갈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별로 없는 시간이었기에 이곳까지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산 아래 주차를 했어야 했을 것이다.

≪ 보(Bau) ≫라는 뜻은 프로방스 방언으로 ≪깎아지른 ≫이라는 뜻이다.

그처럼 아찔할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이 좌우로 깊은 협곡을 두고 홀연히 수직으로 솟아 난 것이다. 거함의 갑판 같은 절벽 위의 넓직한 평지는 폭이 200미터에 길이가 900미터이다.

여기에 성채를 쌓은 것이데 성채 밖에는 성채의 규모에 비해 조그만 마을이 딸려 있다.
마을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두꺼운 돌담 집에 조그만 창문, 포석이 빈틈없이 된 길, 돌 층층계 등 보이는 것은 모두가 돌이며 흰 바위뿐이다.

창공에 노출된 이 마을은 사방에서 불어 오는 사나운 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온통 돌로 되어있는 것이다.

서편으로 기운 햇살이 돌집과 돌담을 수평으로 비추어 벽에 박힌 돌들이 햇빛을 여러 각도로 반사해서 분산시키고 있었다.

간혹 바위틈으로, 아니면 담벼락사이로 비집고 나온 몇 그루의 나무와 절벽 위 조그만 빈터에 마련된 정원의 빈약한 초목들이 돌 투성이 절벽마을을 조금은 부드럽게, 그리고 살아있는 듯 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절벽아래의 깊은 계곡에는 아기자기한 마을의 지붕과 정원, 올리브나무 밭, 덤불 숲들이 조감도 모양 펼쳐졌다.

멀리 지중해 쪽으로는 스탭지대 ≪ 라 크로 ≫, 늪지대 ≪ 까마르그 ≫까지, 동쪽으로는 엑스-앙- 프로방스, 쌩뜨 빅뚜아르 산까지, 북으로는 뤼브롱산과 방뚜산까지, 그리고 ≪ 론느 ≫강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성채 입장을 포기하고 대신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전망을 더 감상하기로 했다.

성채로 향하는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골동품상점과 기념품가게를 지나서 있는 절벽 위의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그럴 듯 했다. 카페이름이 ≪ 노아의 방주 ≫ 라는 뜻인 ≪ 라르슈(L’Arche) ≫였다.

넓은 홀 안에는 손님이 없어 썰렁했고 카페주인여자는 손님인 우리를 본척 만척한 채 테이블에 앉아 핸드 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딸로 보이는 아이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 좋아 보였던 테라스는 담이 높아 전망이 없었다. 게다가 파라솔 하나는 망가져 보기 흉하게 늘어졌고 테이블엔 먼지가 덮여 있었다. 저녁 햇살이 옆으로 비추어 견딜 수 없이 덥기까지 했다.

우리 일행을 본척 만척하고 있는 카페주인의 태도도 못 마땅했던 터라 우리는 자리에 앉지 않고 도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조안이 안보였다. 각자 구경하기에 바빠서 종종 서로를 잃어 버리기 때문에 조안이 우리와 지금까지 같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일행을 둘로 나누어 나는 윗쪽 길로, 나머지는 아래쪽 길로 찾아 나섰다.

윗쪽길을 한참 올라 가 봐도 종적이 없어서 다시 내려 오다 우리가 들어갔던 카페를 다시 쳐다 보니 카페 집 딸아이가 문을 가로 막고 조안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당돌하게 생긴 그 여자아이가 말하길 화장실만 쓰고 그냥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용료를 지불하면 될 텐데 사람을 가로막고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잘 못된 일이지 아니냐고 했더니 옆에 있던 엄마가 딸에게 길을 비켜주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동전지갑을 꺼내서 사용료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2유로라고 했다. 그래서 50전짜리 하나를 우선 꺼내서 주니 냉큼 받았다. 나머지를 마저 채워 주려고 찾는데 하는 꼴도 괘씸하고 화장실 사용료 치고는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2유로면 옛날 돈으로 13프랑이 넘는데, 당신네가 그렇게 많이 요구할 수는 없다. 화장실사용료가 2유로라고 어디에 써서 붙였느냐 ? ≫고 하니까 앙큼한 주인여자는 지금 써서 붙이겠노라고 했다.

≪ 써서 붙이면 내가 2유로를 줄 텐데 당신들 집에서 화장실 사용료로 2유로를 받았다는 것을 이 아래에 있는 관광안내사무소에 가서 신고할 참이다. 그래도 좋으냐 ? ≫하니 그렇게 하려면 하라면서 그 당돌한 여자아이가 같이 가겠다고 앞장을 섰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엄마는 딸한테 그냥 놔 두자는 눈짓을 했지만 철없는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 아이 뒤를 따라 관광안내소로 걸어 갔다. 사무소 앞까지 앞장섰던 아이는 웬일인지 더 이상 가지 않고 층계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 아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안내사무소로 들어갔다.

아까 마을에 도착해서 들렸을 때 내가 요구한 마을지도를 나에게 주었던 여사무원은 없었고 다른 여사무원이 앉아 있었다.

나는 여사무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마드므아젤, 나는 이 마을이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100개 마을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데, 이 마을을 방문하여 친절치 못한 대우를 받음과 동시에 모르고 쓴 화장실 이용료를 어거지로 요구 받고 그 불만을 얘기하려고 한다 ≫

여사무원은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따라 들어온 아이에게 아는 척을 하고는 그러면 그 불만사항을 적고 사인을 하면 상부에 보고하겠노라고 했다. 여사무원은 두꺼운 장부를 펼쳐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항의문을 이렇게 적었다.

≪ 관광사무소 소장귀하, 우리는 카페 ≪ 라르슈 ≫에 들어 갔다가 카페주인이 서비스할 생각 없이 힐끗 쳐다 보면서 핸드폰으로 전화만 걸고 있기에 손님대접을 못 받는 것에 기분이 상해서 다시 나왔다. 그 사이 나의 친구가 화장실을 사용했다고 카페주인과 딸이 문을 가로 막고 감금한 상태에서 어디에 써 붙여 놓지도 않은 화장실 사용료로 2유로나 강요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던 나는 다시 들어가 50전을 주었고 관습으로는 그것도 많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말을 모르는 내 친구가 감금상태에서 화장실사용료로 그렇게 많은 2유로를 주어야 하는지 안주어야 하는지를 답해주기 바란다. ≫

이렇게 쓰고 나서 나의 이름과 주소와 날자를 적고 사인을 했다. ≪ 이 항의서의 답을 내가 받는거지요 ? 마드므아젤 ≫ 했더니 ≪ 그 답은 우리 소장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마을 시장이 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답을 받으려면 몇 달은 걸릴 것이다.

우리가 동양인이라고 멸시했던 여자아이는 내 뒤를 따라 사무소에 들어와서 내가 항의서를 거침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을 보고는 기가 죽었고 1유로 50전을 더 달라고 하지도 못했다.

나는 그 아이를 상대도 않고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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