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3) - 도움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1254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8.10. 15: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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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3) -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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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7-7

1971년 8월 29일 일요일, 오를리 공항에 떨어진 나는 대학街 까르띠에 라뗑, 뤼 데제꼴에 있는 어느 조그만 호텔에서 첫날 밤을 잤다. 그 다음의 이틀 밤은 파리 남쪽에 있는 국제 대학기숙사 村, 씨떼 엥떼르나시오날 유니베르씨떼에 있는 튀니지館에서 잤다.

기숙사촌 각나라 관에서는 기숙사생들이 여름방학동안 기숙사를 떠남으로해서 일반 여행객들에게 그들의 빈방을 빌려주고 있었다.

집 얻기가 수월치 않았는데, 마침 한 학생부부가 얻어 놓고 후회한다는 스튜디오가 있다기에 가서 보고 그만한 집도 얻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그 집을 그냥 인계 받았다. 스튜디오는 영어로는 아뜰리에를 의미하지만 불어로는 방이 하나만 있는 아파트를 말한다.

스튜디오는 세느강 서쪽 좌안에 면한 파리 15區 119번지 뤼 드라베그루에 있는 낡은 4층집의 마지막 층에 있었고, 집세는 미화 100불에 해당하는 500프랑 이었다. 나는 거기서 6개월 가량 살았다.

거처가 이렇게 빨리 확정되자 서울에서 한달치 수강료를 미리 낸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에 가서 등록을 하고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의 집에서 가까운 메트로 역은 꽁방시옹 역이었다. 거기서 시내쪽으로 다섯정거장을 가면 몽빠르나스 역이고 거기서 한번만 갈아타면 아카데미가 있는 바벵 역이나 미술학교가 있는 쌩제르망 데프레 역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받은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의 수강증을 근거로 비정규유학생자격을 얻어 어렵게 출국수속을 밟았다. 비정규유학생이라는 것은 정규유학생 자격시험을 치루지 않고 출국하여 정식학교가 아닌 한 기관에서 길어야 6개월 정도 연구(공부)를 하고 귀국하는 유학생을 말했다.

그때는 관광여행을 위한 여권은 전혀 없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려면 프랑스 정부의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는 길이 있었는데 선발시험에 통과되려면 불어를 능통하게 잘 해야 했는데 나에겐 는 그런 실력이 없었다.

내 여권의 유효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프랑스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나는 이곳에서 화가로 인정 받기 전에는 결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아카데미에 한 달 동안 다니면서 곧 있을 파리국립미술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도시에를 준비했다.

도시에란 미술학교에 다닐 자질을 가졌다는 것을 시험관에게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데생이나 에스끼스 또는 채색을 사용한 작품등으로 만든 어느정도 량의 작품집을 말했다.

입학시험은 면접이 전부였다. 수험생은 준비해간 도시에를 시험관에게 보여주고 미술학교에 왜 다니려하느냐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었다.

면접시험에 통과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입학후에도 도시에를 들고 자기에게 맞는 실기 지도교수를 찾아 다니면서 작품을 보여주고 교수가 자기 아뜰리에의 학생으로 받아 준다는 허락을 얻어야 그 교수의 지도아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뜰리에가 정해지는 것이다.

파리미술학교는 연령제한이 있어서 만 26살 까지만 받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군 복무 때문에 늦어졌다는 핑계를 대야만 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미술가로서 데뷔해서 활동해 왔다는 사실도 숨겨야 했다. 잘못하면 미술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재학생의 연령제한이 만 31살까지였기 때문에 나는 겨우1년 동안만 정식학생으로 다녔고 그후 3년은 청강생 자격으로 다녔다. 그러나 청강생이라 하더라도 디플롬이라고 부르는 학위를 딸 자격이 없을 뿐이지 학교생활은 정식학생과 똑같이 누릴 수 있었다.

열일곱 열여덟살 짜리 어린 학생들과 같이 다니느라 좀 창피했지만 늦깎이로나마 파리미술학교생활을 이해하고 경험한 것은 내 일생에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프랑스에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미술학교 학생이 되려는 뜻은 이 기회에 나를 제로로 돌려놓고 새 출발해 보자는 각오 때문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미술의 본고장 파리에 도착한 젊은 예술가들 모두가 그런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학생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 외국인이 학생신분을 가지면 프랑스 정부가 학생들에게 베풀고 있는 많은 혜택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으며 프랑스 체류허가를 연장 받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그림그리기를 시작할 때 데생공부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미술대학 졸업반 시절 미심쩍게 시작한 추상화 세계를 집어 치우고 다시 구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이브 브레이어의 아뜰리에를 선택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온종일을 보내면서 이층에 있는 이브 브레이어 아뜰리에에서는 유화로 누드를 그렸다. 아래층 현관 옆 노련한 모델이 포즈를 취하는 데생교실에서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크로키와 데생을 했다.

주말에는 길거리에 나가 이젤을 세워놓고 파리풍경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면서도 쉴새없이 미술관을 방문하고 전시회를 보러 다니느라 바쁘게 지냈고, 시간과 계절은 정신없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 시절 나와 중고등학교 동창생으로 미국유학을 하고 있던 S가 파리에 와서 나를 찾았다. 그와 나는 쌩 미셀 거리의 어느 까페에서 만났다. 파리에 온 이후 처음으로 느긋한 자세로 어렸을 때의 친구와 마주 앉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미술대학으로 그는 공과대학으로 각자의 전공을 향해 헤어진지 10년만의 만남이었다.

작년12월, S는 파리에 메세나를 창립하여 청년작가를 도웁는 일을 하기 위해 파리에 왔다. S와 나는 세느강 옆 노트르 담 까페에 앉아 메세나에 대해 의논을 하면서 우리 두사람이 30년 전에 처음 만난 까페가 저 까페였던가 아니면 그 옆의 까페였던가 하면서 그 첫만남을 회상했었다.

파리의 첫 겨울을 보내고 1972년 봄, 나는 몽빠르나스와 가까운 56번지 불르바르 빠스뙤르에 방이 두 개 있는 망사르드로 집을 옮겼다.

대로에 면해 있는 그 집은 석재로 짓고 장식한 7층집이었다. 맨 윗층 망사르드에 미국 신문기자가 살다가 내놓는 방 둘 짜리 아파트였는데 그 기자와 친분이 있던 S씨가 그 집을 인계 받아 나와 함께 방 하나씩을 나누어 쓰자고 제안한 것이다.

S씨는 두 달만 살다가 귀국할 예정이엇고, S씨가 떠나면 그의 방을 아뜰리에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700프랑이나 되는 집세가 좀 부담스러웠지만 일 할 수 있는 방이 생긴다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때는 벌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파리의 여러 살롱들이 쇠퇴하고 명성과 권위가 많이 퇴색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카데미에 다닐 때 살롱 도똔느에 풍경화를 출품해서 입선을 했고 파리미술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르살롱에 인물화를 출품해서 특선에 입상했다. 그리고 살롱 데엥데빵당에도 연달아 작품을 출품했다.

나는 그동한 작품제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프랑스 정부가 작가들에게 배정한다는 아뜰리에를 얻기위해 서류를 갖추어 신청했다.

아뜰리에를 신청하려면 먼저 예술가를 위한 사회보장제도에 가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메종데자띠스트에 등록을 하고 정식으로 직업 화가라는 증명을 받고 세무서에 직업화가로서의 세무신고를 마쳐야 했다.

아뜰리에를 배정받는 것이 지금은 더욱 어려워 졌지만 그때도 쉽지 않았으며, 운도 따라야 했다.

당시 프랑스 문화성은 아뜰리에를, 신축하는 서민아파트에 붙혀서 짓고 있었다. 예술가와 서민들을 한 환경속에서 살게 함으로써 삭막할 아파트단지에 예술가적 분위기를 입히려는 정책적 배려에서 였을 것이다.

아뜰리에를 신청해 놓았는데, 가을이 되자 내가 사는 파리15구 구청 주택담당직원이 나의 망사르드 집을 찾아와 방의 크기와 천장의 높이 등을 줄자로 세밀히 재어 보고 갔다. 아마도 화가가 현재 일하고 있는 장소가 일을 할만한 장소인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주택담당 직원이 나의 열악한 환경을 점검하고 갔지만 해를 넘기도록 아뜰리에 배정에 대한 어떠한 답도 받지 못했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W의 전시장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 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앙또니오즈씨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앙또니오즈 국장의 목소리가 나오자 나는 인사도 변변히 건네지 못한 채 어물어물하면서 혹시 내가 신청한 아뜰리에에 대해서 답을 줄 수가 있느냐고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정쩡한 질문을 던졌다.

앙또니오즈 국장은 의외라는 듯이 조그맣고 빠른 음성으로 여기는 그런 답을 주는 곳이 아니라면서 매정하게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나는 그 순간 매우 당황했고 당돌하게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건 것을 후회했다. 그 후회의 순간은 목마르게 고대하던 아뜰리에 배정에 대한 꿈을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뜰리에다운 아뜰리에가 없다고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로부터 달포쯤 후 파리 서민 아파트 사무국에서 나에게 배정해 줄 아뜰리에 주소를 알려 주면서 가서 보고 입주할지를 속히 정하라는 통지서가 날라왔다.

포기한 꿈이 되살아 났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곧 모든 절차를 밟고 그 아뜰리에에 입주했다. 내 일생에서 가장 큰 행운중의 하나를 만난 것이다.

내게 배정된 아뜰리에는 파리 15구 뤼 드라미랄루셍 서민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아파트 각동의 옥탑층에 2층으로 천정을 높게하여 아뜰리에를 만들었는데 이 아파트 단지에는 모두 24개의 화가 아뜰리에가 있다. 그리고 10개의 조각가 아뜰리에가 지상에 별채로 마련돼 있다.

올해로 꼭 30년간 나는 여기서 살면서 일해 왔다. 그때 아뜰리에를 배정받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프랑스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화가가 일할 장소인 아뜰리에를 얻는 행운을 만났는데도 그림 그리기가 너무 힘들다면서 프랑스를 떠나겠다고 짐을 쌌다면 그것은 더욱 더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한번은 아뜰리에 천정 평면유리창이 비만 오면 물이 새서 일을 못하겠으니 수리를 빨리 해 달라고 늑장만 일삼는 관리사무소에 불만을 강하게 토한 적이 있었다. 그때 거기서는 나에게 당신은 반 고호가 살던 데를 가 보았느냐 화가는 아뜰리에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 문제라고 오히려 면박을 주던 일도 있었다.

프랑스 문화성이 배정한 아뜰리에에서 일할 수 있는 행운을 나에게 안겨 준 고마운 사람이 베르나르 앙또니오즈씨가 아닐 것이다라고 아무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빠스뙤르집에서 화구를 옮겨놓자 마자 곧 앙또니오즈씨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아마도 그 편지엔 이렇궁 저렇궁 하면서 잘 못쓰는 프랑스어로 횡설수설 했었을 텐데 나의 고마운 마음을 그에게 전한 구구절절은 딴 내용이 아니었을 테고, 물고기가 이제 물을 만났노라고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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