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죽음과 절망을 선으로 그린 이유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12091 건
홈페이지 작성일 2004.11.01. 16: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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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 주셨군요.

전혀 알지 못하는 분과의 웹상에서의 대화는 처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렸을 때 배웠 듯 백의민족에 자랑스러운 단일 민족이라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면 금새 아 그러시군요하고 어떤 인연이라도 줄줄이 인연이 잡혀 짐을 압니다. 우선 경순씨의 친구이시니… 지난번에 이 그림을 왜 슬픔속에서 그렸는지에 대해 설명해 드렸는데 우리민족이 공유해야 하는 그 슬픔에 대하여 이해 하시는 말씀을 다시 주셔서 오늘은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조금 더 붙히려 합니다.

1월에 죽음과 절망을 그릴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생각 했을 때 참으로 막연 했었습니다.

국경없는 의사진들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가지고 나온 자료로 94년부터 프랑스 잡지, 신문과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한 ≪ 꼬레 드노르(북한)의 인권문제 상황 ≫과 ≪ 굶주린 동포들의 실상 ≫을 사진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세상에 호소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커다란 문제로 저에겐 보였습니다.

저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부추긴 친구 신우는 나에게 많은 자료를 보냈습니다.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사는 어렸을 때 부터의 친구 건축가 남신우와 1996년 부터 본격적으로 서로의 직업을 떠나서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의 모국에 대해서 대장편의 육필 편지가 대서양을 오가며 토론를 해 왔었습니다.

신우는 우선, 세계도처의 인권문제 해결에 앞장서 있는 워싱톤 소재의 디펜스 포럼 재단에서 발행한 북한의 인권문제 보고서와 북한내부의 차단된 실정을 몰래 촬영한 필름을 여러권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문제에 관련된 사진은 여러군데의 웹 사이트에서 찾아 보라고 일렀습니다.

한뭉치의 디펜스 포럼 보고서는 북한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많은 삽화가 담겨 있었고 필림들은 대개는 프랑스 TV에서 방영된 필림이었고 일본의 NGO 단체들이 만든, 북한내에 잠입해 비밀히 촬영한 것 이었습니다.

거기에 실려 있는 간결한 삽화들은 그러나,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서운 그림과, 있어서는 안 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한 이야기를 데생으로 생생히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본, 충격적인 많은 삽화들 처럼 그토록 절실한 그림을, 나도 그와같이 진실로 그려 낼 수 있을까에 대한, 나에 대한 의심이 금시에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보다 그림으로 대하는 느낌이 더욱 충격적 이었으며 느껴오는 울분이 더욱 컸습니다.

그래서 기계에 의존해서의 생생한 사실을 재현한 한장의 사진 보다도 서툴더라도 인정이 스며 들어간 그림이 전달하는 힘에 강하고, 강한 만큼 반응도 크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닭았습니다.

나는 이웃집의 은퇴한 생물학자 친구집에 가서 인체해부학 책을 얻어 왔고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 담긴 책도 빌렸습니다.

그리스 조각상이 담긴 책을 빌려 온 것은 창 멀리 던지기 고대 올림픽 운동선수가 몸을 한껏 뒤로 제쳐서 멀리 던지려는 자세에 핵폭탄을 들고 멀리 던지려는 자세를 오버랩하여 북녘땅에 계속 죽치고 있는 악마같은 독재자 상을 부각해 낸다는 구상을 느닷없이 떠 올렸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림을 대단히 큰 한폭의 캔버스에다 구성해 그려내고 싶었지만 운반을 생각 해서는 가로 세로 80cm 정사각형으로 된 캔버스 8개를 연이어 붙혀서 하나로 그렸다가, 다 그린 다음엔 분해해서 운반이 쉽게 되도록 하여야 했습니다.

North Korean Holocaust 전시회는 서울, 동경,워싱톤을 옮겨 다니면서 열 계획임을 알려 왔었습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을 착수 하기전, 내용을 어떻게 할 것 인가를 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 하지요. 그런 다음엔 어떤 캔버스에 어떻게 내용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넣을 까를 정하는데도 한참 걸리고, 내용을 이렇게 저렇게 스켓치를 해 보면서 일을 슬슬 시작하게 마련인데, 시작이 반이라고 거기 까지 이른 화가들은 거기서 긴숨을 한번 쉴 수 있습니다.

나는 캔버스를 이틀동안 연결하면서,

≪ 그림속에 처참한 고문 장면을 그려 넣지 않고도, 총살로 죽이고 몽둥이나 돌로 때려 죽이는 잔인한 장면도 그리지 않고, 굶주려 흙을 집어 먹거나 쥐를 잡아 먹는 짐승같은 아이들을 그리지 않고, 강제노동으로 죽을 고생을 하는 허기진 불쌍한 동포형제들을 그리지 않고, 생체실험을 태연히 당하는 비참한 사람도 그리지 않고, 까까옷을 입은 평양아이들이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꾀죄죄한 시골아이들을 거지라고 놀리는 장면도 그려 넣지 않고, 말로나 글로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더많이 있는 악독한 사실들을 일일이 그려 넣음이 없이도 우리들의 북녘땅을, 지옥보다도 못한 죽음과 절망의 땅이라고 생생히 그림으로 말해서 ≫

세상에 호소 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 뼉다귀만 남은 앙상한 여인의 휑한 눈, 눈물조차 메마른 꽃제비의 허공에 떠있는 눈, 언제 잡혀 갈지 몰라 잔뜩 겁먹은 공포의 어린 눈들, 세상의 비극을 심판 하고자 한 매서운 어린 눈, 만행을 응징하는 어린이의 무서운 눈, 죽음을 앞에 둔 절망의 눈… 그리고 피부가 썩어 들어 간 어린 시체의 영원히 감은 눈 ≫

≪ 그런 기막힌 눈들을 무참히 짓밟는 꼭두각시들의 행군, 멍텅구리 행군에 맞서기 위해 살아 난 해골, 그리고 더러운 군화 발길에 채이는 한많은 검은 해골 ≫

≪ 창살에 발등을 찍혀서 창살에 갇힌 그림자 처럼 힘없는 실루엣, 정치범 ≫

≪ 윤곽선으로만 표현 해 내자. 내가 잘 쓸 줄 아는 색채는 일체 사용하면 안된다. 색채가 없는 그림으로 그려라 ! 거기엔 색채란 있을 수 없다 ! ≫

제 웹 사이트를 다 뒤져 보실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 해야 됨을 압니다. 그것들을 다 보아 주시고 감상해 주시려면 미술관에 가면 다리 아프듯 함을 알기 때문에 참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찬찬히 보아 주신다는 것이 얼마마한 정성일까를 잘 압니다.

제가 어려서 부터 색채 사용에 능숙능란 했었더라도 그색체의 어지러운 사용때문에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색체들이 방해하고 있구나를 안 것은 한참 후 였습니다.

그때가 제나이 서른 여섯살 때인 프랑스에 도착한지 5년후 였습니다.

저는 그때 고민을 너무 많이 했었기 때문에 제가 잘 쓰는 단어사용이나 무의식적인 행동 조차도 모두 지독히 싫어지면서 저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몸부림을 치던 시기 였습니다.

제가 잘 쓰던 색체와 남들이 멋지다는 데생도 싫어졌으며 어떻게 하여야 내가 장기로 여기는 나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처치 해 본단 말이냐고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나의 색채를 일단 다 버렸다가 다시 찾으면 혹시 그것이 정말 나의 타고난 색채인지 아닌지 나중에 다시 알게 되리라는 확실치 않은 생각을 토대로 빠렛뜨에서 색채를 다 없애고 5년간 덤덤한 단색조로 된 그림을 그렸고 그런 한편으로는 때늦게 선에 대한 관심이 생겨 선에 대한 이해를 처음으로 깊숙히 했던 것 같습니다.

색채화가 마티스도 그런 문제를 안고 있었는지 화가는 모름지기 모든 사물을 선으로 그려 낼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양화라면 음영(명암)의 그림인데 음영을 사용하지 않고 선으로 형태와 볼륨감을 잡아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선의 예술인 전통적 동양화의 기법을 깊히 들여다 보았던 것 같습니다.

마티스는 찬란한 색채를 잘 구사하면서도 간단한 선으로 색채를 제압하고 엮어서 정리하는 이름난 화가 일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는 선을 긋지 않고도 색면과 색면이 만나서 저절로 생기는, 선 아닌 선을 보이게 했고 급기야는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나온 예리한 윤곽(선)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급작히 매우 유명해 졌습니다.

한석봉 어머니가 촛불을 끄고 석봉에게는 붓글씨를 쓰게하고 당신은 떡을 썰고는 석봉이 장님되어 쓴 글씨가 비뚤다고 깨우쳐 명필을 만들었듯이 마티스도 마티스 나름대로 한 공부가 있었습니다.

마티스는 밤중에 전등 아래에서 선으로 소묘를 해 보고, 전등불을 끄고 똑같은 소묘를 해봐서 불키고 그렸을 때와 똑같은 만족이 있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마티스가 선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나서야 색채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알게 됐다고 저는 믿습니다.

색채는 매우 어렵고 어지럽습니다. 저는 결코 마티스 같은 천재가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과 절망을 그릴 때 선으로 그렸습니다.

슬픔의 표현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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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제목 작성자 첨부 작성일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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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답글 다시 오화백님께 전정자 2004.10.23 1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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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답글 죽음과 절망 중앙부분 확대 오천룡 첨부파일 2004.10.30 11577
19     답글 죽음과 절망 왼쪽부분 확대 오천룡 첨부파일 2004.10.30 1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