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피라미드 (1)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6086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7.04. 15: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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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피라미드 (1)

2004-3-24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출입구로 유리 피라미드가 완성됐을 때 사람들은 투시도가 처음 발표됐을 때 느꼈던 강렬한 인상보다는 못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튼 5년전에 그 설계도가 발표됐을 때 모두들 야 ! 할정도로 멋있어 했다.

아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는 비장의 유리 피라미드 설계도면을 지니고 미떼랑대통령 집무실로 자신만만해서 들어갔다.

그러나 대통령집무실에 들어 간 페이는 설계도를 테이블위에 펼쳐 보이기 보다는 설계도와는 상관도 없을 프랑스역사와 파리날씨에 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미떼랑은 대통령에 취임 하자마자 세계에서 제일 큰 궁전인 루브르宮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루브르궁 측면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재무성이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 루브르박물관은 루브르궁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때는 박물관을 지금까지의 ≪ 루브르 ≫에서 ≪ 그랑(大) 루브르 ≫로 그 명칭도 바꿀 심산(心算)이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페이는 확장될 그랑 루브르의 입구에 걸맞겠다고 생각한 유리 피라미드를 주문도 받지않고 혼자 슬며시 설계하고는 파리에 와서 그것을 보여 주겠다고 느닷없이 미떼랑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옛날에 페이는 파리근교에 고층빌딩을 집중적으로 세울 새도시, ≪ 라 데팡스 ≫의 1969년도 새로운 마스터플랜에 응모했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는데 채택되지 못했던 그때의 일에 대해 한이 맺혔던 것 같다.

뉴욕의 마천루를 동경해 마지 않는 프랑스는 1950년대 초반부터 파리 서쪽 센느江 건너편 벌판인 라데팡스에 뉴욕과 흡사한 초고층 사무실빌딩의 신도시를 세울 공사를 시작했다.

그곳엔 파리를 방어한다는 뜻이 담긴 ≪ 라데팡스 ≫라는 조각이 광장 한군데에 세워져 있었었는데 그 신도시이름을 정할때 그 조각이름을 땃다.

마스터플랜에 응모했다 떨어진지 20여년이 지난 후, 페이는 이번엔 미떼랑대통령에게 루브르박물관 확장을 도웁는 적합하고 중요한 설계도가 있다고 하면서 면담을 자청했던 것이고 미떼랑은 세계적인 건축가로 지금 군림하고 있는 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무슨 설계도를 만들었길래 그럴까 하면서 30분 동안만 만나 주기로 했다.

페이는 그때 워싱턴의 내셔날 갤러리 동관(東館)을 설계하여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프랑스가 미술의 중심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과시해 보려는 듯 뽕삐두센터를 파리에 신축하여 현대미술관으로 1977년에 요란하게 준공했다면 미국은 그 다음해 그것에 질세라 워싱턴 내쇼날 갤러리 동관을 신축해서 개관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칼하게도 뽕삐두센터가 싸늘한 강철과 유리를 사용한 현대적 미국건축양식을 본 딴 것과는 반대로 페이의 설계는 육중한 석재를 사용한 전통적 유롭건축양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때 한창, 전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를 중공선수들이 모조리 제패하고 다니 던 때라서 매스콤들은 프랑스와 미국이 핑퐁식 문화경쟁을 하고 있다고 빗대어 보도 했다.

중국탁구에 빗댄 것은 페이가 중국태생의 미국건축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이는1917년에 광동에서 태어 나서 2살때부터 홍콩에서 살았고 18살때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리고 건축공부를 엠아티(MIT) 공과대학에서 했으며 37살에는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페이는 내셔날 갤러리 동관과 서관을 연결할 때 지하로 통로를 만들면서 천장창을 만들어 자연광선을 끌어 들였다.

나는 1980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워싱턴 내쇼날 갤러리를 관람하러 갔을 때 서관에서 동관으로 가는 지하복도에 드문드문 만들어 놓은 천장창이 유리 피라미드로 처리되있는 것을 인상적으로 올려다 보았고 밖에 나가서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천장창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해서 지상으로 돌출시켜 놓는 것이 그냥 평면창으로 하는 것 보다는 더 많은 외광을 실내로 끌어 들이는데 효과적일 것이었다.

페이는 그때 그렇게 실험해 본 후 그 조그만 유리 피라미드를, 에짚트 사막에 서 있는 피라미드 원형대로 확대하여 투명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마침내 내부 골조구조를 완벽하게 구축시킨 유리 피라미드 도면을 완성 해서는 그것을 세울 이상적인 장소로 루브르박물관 정문앞 안뜰인 ≪ 나폴레옹 꾸르 ≫를 첫번째 장소로 지목했다.

나폴레옹 꾸르는 샹제리제쪽을 향하여 ㄷ자(字) 모양으로 열려진 루브르궁의 중심 안뜰이면서 거기서 부터 보이는 일직선상의 전망은 까루젤 개선문 아치속에서 정가운데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불리는, 꽁꼬르드광장에 우뚝솟은 룩소의 오벨리스크를 먼저 잡아 놓고 있다.

룩소의 대(大)오벨리스크는 거기서 부터 2 킬로미터 뒤에 있는 에뚜알광장의 개선문을 좌우로 정확히 가르고 있으며 개선문 아치밑으로는 거기서 또다시 6킬로미터 떨어져있는 박애의 문(門), 그랑따르슈까지 일직선상으로 치닫는 기막힌 시각인 파리의 도시의 축(軸)을 열고 있는 기점이 되는 곳이 나폴레온 꾸르 이다.

페이는 에짚트 유물이 지하에 많이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과 룩소의 오벨리스크가 똑바로 보이는 전망을 가진 나폴레옹 꾸르야 말로 유리 피라미드가 있어야 할 정확한 장소로 꼽아 논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전위미술가들은 그들의 새로운 미술운동을 벌릴 때마다 미술관속의 미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미술관은 미술의 무덤 그자체라고 매도하면서 우리는 그런 죽은 미술을 계승할 아무런 의무가 없노라고 매번 외쳤다.

그렇지만 운명적으로, 전위미술가들도 나중엔 미술관에 들어가 파묻혀야만 했다.

베르디의 아이다는 억울하게 국가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피라미드속에 생매장 당해야 하는 라다메스를 따라 몰래 피라미드 속에 숨어 들어 가서는 그들 둘만의 영원한 사랑을, 신(神)들의 영혼이 영원히 숨쉬는 무덤속, 피라미드 속에서 이루고 말았다.

그런저런 피라미드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지 모르지만 페이는 미술의 무덤이라는, 미술의 영혼이 쉬고 있을지 모르는 루브르 박물관을 밖에서 잘 들여다 보이게 보물상자의 뚜껑을 열어 재치듯 개방하여서 현대인 관람객들과 더 가깝게 숨쉬게 하려는 의미를 주려고 유리 피라미드를 생각해 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애석하게도 유리 피라미드를 세우기를 마다한다면 설계도를 둘둘 말아 런던 대영박물관으로 페이는 달려 갈 참 이었다.

보여 주겠다는 도면이 도대체 무슨 도면인지 미떼랑은 속히 보고 싶었으나 페이가 도면을 곧 펼칠 생각은 하지않고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역사의 위대성이 어디 있으며 파리의 고약한 겨울날씨는 일조량이 매우 부족 하다든가 하면서 계속 딴전을 부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브리핑 준비를 철저히 해 왔기도 했지만 페이가 프랑스 역사와 파리 날씨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을 달변으로 쏟아 놓는 바람에 미떼랑은 30 분 간만이라고 약정한 시간을 스스로 어기고 그날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면담을 계속했다.

1190년 필립 오귀스트 왕(王) 때부터 짓기 시작한 루브르 궁(宮)은 800년동안 왕들과 황제들에 의해서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서 세계 최대의 왕궁(王宮)이 됐지만 루브르궁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대(大)왕궁으로서 보다는 라조꽁드(일명 모나리자)나 밀로의 비너스와 같은 보석같은 미술품을 잔뜩 소장하고 있는 세계 최고 최대의 박물관으로서 세상에 명성이 더 나 있는 것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宮)으로 옮겨 가면서 텅 비게 된 루브르궁은 내부수리 내지 치장을 계속 하기위해 동원되는 떠돌이 예술가와 장인들이 궁의 한쪽편에 거처하면서 일을 했으며 왕들의 거실쪽엔 당대의 문학가, 건축가, 과학자. 화가, 조각가들로 구성된 예술원회원인 아카데미시엥들이 차지했고 1699년부터는 그 아카데미회원들이 그들의 작품전시회를 스스로 궁에서 열기 시작 함으로서 루브르궁은 미술관-박물관으로 출발할 인연을 그때부터 맺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계몽주의시대의 박식한 사람들의 창안으로, 왕들이 세계각처에서 모아들인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시하게 되면서부터 루브르궁은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갖추어 나갔다.

프랑스와 1세는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한 최초의 왕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라조꽁드를 비롯해서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작품등 12점의 그림을 수집해 놓았었다.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는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프랑스와 1세가 프랑스로 초청해서 여생을 보내게 했는을 때 세상의 보물처럼 된, 라조꽁드는 그때 다빈치가 유일하게 프랑스에 지니고 온 작품 이었다.

루이 14세도 무려 2500 점에 달하는 그림을 수집했다. 그리고 나서 루브르궁이 정식으로 박물관으로서의 문을 연 것은 루이 16세가 아직 단두대에 올라 가기전인 1793년이었다.

나폴레옹도 정복지 마다에서 노획한 미술품과 조공으로 받아 들인 미술품들을 에집트원정 장군인 드농장군과 스땅달로 하여금 선별해 정리하도록 해서 루브르 박물관소장품을 많이 불려 놓았다.

루브르의 또하나의 귀중한 보물이 된 밀로의 비너스도 1820년에 지중해 밀로섬의 어떤 밭에서 농부의 쟁기에 걸려 발굴되자 마자 루브르박물관으로 곧바로 날러다 놓았다.

그후에도 계속 프랑스정부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술품을 그 유족으로 부터 계속 기증받아 들이고 국고금으로도 끊임없이 사들이기도 하여서 현재 35만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소유한 최대의 박물관으로 루브르는 크게 자랑하게 된 것이다.

역사와 날씨로 대통령의 혼을 쑥 빼논 후의 페이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간단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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