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에서 에펠탑이 되기까지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294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7.21. 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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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에서 에펠탑이 되기까지

2004-02-24

작년 여름이었던가 보다.

파리로 진입하는 남부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에펠塔 꼭대기는 검은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일레븐 셉텐버 이후 프랑스에서라면 테러범들의 좋은 목표는 에펠탑일 수 있다고 모두들 믿는데하면서 뉴스에 재빠른 래디오로 다이얼을 돌리니, 지금 일어난 에펠탑 화재를 실황중계하고 있었다.

사고원인을 잘 모르던 방송은 잠시 후, 탑 전망대 바로 밑 부분에서 전기합선으로 불이 일어 난 것 같다며, 지금 수백명의 방문객들이 층계와 엘리베이터를 통해 탑 밖으로 대피중이라고 했다.

멀리 車窓 밖으로 보이는 검은 연기는 베를린에서 힛틀러가 파리총독에게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한 다급한 질문을 공연스럽게 연상시켰다.

화실로 돌아온 나는 창가에 서서 연기를 계속 뿜어대고 있는 에펠탑을 딱한 마음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으나, 잠시후 검은 연기가 회색 연기로 바뀌면서 완전히 진화됐다.

그날 저녁 뉴스는 에펠탑 화재사건으로 시끄러웠다.

에펠탑의 조명을 하도 요란하게 이렇게 저렇게 여러번 바꾸더니 전깃줄에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난 1월 말에는 후 진 타오 中國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맞아, 도착하는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나흘동안 에펠탑을 빨강색 에펠탑으로 조명했다.

에펠탑은 7년마다 한번씩 부식을 막기 위해 페인트칠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에펠탑의 색갈을 이제까지 일곱번 가량바꾸었었다.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샛빨강으로도, 샛노랑으로도 칠해 놓았던 적이 있었다. 점잖게스리 지금의 탑색갈이 된 것은 1950년대였다.

이제는 세계적인 照明術을 자랑이라도하듯이, 페인트를 50톤씩이나 들여 색칠해 바꾸지 않고도 밤만되면 탑색갈을 마음대로 바꾸어 놓고 있는데, 지난번 2000년을 전후한 년말과 년초 며칠간은 시차를 두고 칠면조처럼 번갈아가며 색이 변하는 희한한 조명을 한적도 있었다.

그럴때 나도 2000년을 기념하겠다고 칠면조 조명의 한 색갈이었던 초록색 에펠탑을 유화로 그려 놓기도했다.

나는 빨강색 에펠탑의 야경을 언짢아 하면서 저 빨간색갈 한참 보게 생겼군 했었는데, 중국 대통령이 떠나자 마자 본래의 찬란한 황금빛 투명한 크리스탈 조명으로 되돌려 놓아서 여간한 다행이 아니었다.

중국 대통령을 특별히 환영하느라고 그랬겠지만, 다른 나라 국가원수가 방문할때는 기껏해야 샹제리제거리 양편에 그나라 국기를 쭉 게양해 줄 뿐인데 반해서, 그것은 물론이고 밤의 에펠탑을 빨갛게 물들였을 뿐만 아니라, 일년내내 여러행사를 줄줄이 벌리 겠다고 금년을 아예 중국의 해로 정했고, 중국 설날에 맞추어선 110미터나 되는 大龍을 天津에서 부터 배로 날라다 샹제리제에서 龍춤을 추는 大 퍼레이드를 펼치도록 선심까지 썼다.

그런 환대를 받아 기분이 호탕해져서는 아닐테지만, 어떻든간에 후 진 타오는 뚤루즈에 가서 신형 에어버스를 21대나 샀다.

관광객의 방문을 끊임없이 받아서도 그렇고, 에펠탑은 아무튼 프랑스의 돈벌이를 위해서 밤낮으로 뛰는 탑이됐다.

이런 에펠탑이 서운하게도 세워진지 20년후 1909년이 되자 계약조건에 따라 리벳을 뽑아내고 허물어서 원래는 연병장(Champs de Mars)이었던 터대로 원상복구해서 약속대로 육군사관학교에 되돌려 주어야 했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解體될 운명에 처했을 때, 무선통신대 귀스타브 페리에라는 대장이 앞장서서 일부러라도 저렇게 높였어야 할 송수신 탑으로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주장하고, 그 주장이 옳다고 사방에서 또 인정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탑이 살아 남게된 것이다.

하마터면 사라질번 했던 에펠탑은 그러고 나서도 1916년 대서양횡단 무선전화, 1918년 라디오 방송 송신탑과 1957년 TV 안테나 설치를 비롯하여 기상관측, 항공관제역할 등등의 갈수록 지대한 가치를 지니게 됐고, 더군다나 에펠에게 다행인 것은, 더이상 탑의 우아함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의심을 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됐다.

1972년에 열리는 뮨헨 올림픽 때에는 뮨헨市가 높이 500미터 가까운 장대같은 텔레비전 중계 송신탑을 세우려 했으나, 설계도를 꼼꼼히 들여다 보던 당시 뮨헨市長은 아무리 높게 하더라도 에펠탑보다 더 높게 할 수는 없다고 단연코 반대하는 바람에 그 높이를 줄여야 했다.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인 동시에 유롭의 상징이기때문이라고 못 박아 버린것이다.

그런 뮨헨시장의 뜻이 있은 후엔 유롭 어느 곳에서도 에펠탑보다 더 높은 건축물은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世紀 를 맞아선, 즉 21세기엔 自然보호운동을 더욱 더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서 녹색운동가들이 나무로 만든 에페탑 복사품을 파리 동쪽에 세울 계획을 세우고 한참 의논들을 하더니 흐지부지 되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해전에는 또 점점 더 많아지는 방문자들에 대비해서 에펠탑지하에 몇층짜리 휴게시설인 카페테리아, 식당, 극장등을 꾸민다는 도면을 그렸던데, 어떻게 되어가는지 그뒤엔 소식이 없다.

미국에 선물할 자유의 여신상의 골조를 구축했고, 오베르뉴 넓은 계곡에 높은 다리(Viaduc de Garabit)를 완성한 철의 마술사 귀스타브 에펠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장에, 1884년부터 구상해 온 300미터 높이의 奇想天外한 철탑을 세우는 계약을 맺었다.

1889년, 그 만국박람회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오베르뉴에서 552미터 다리로 수평구조물에 성공한 에펠은 언젠가는 수직구조물로 높디 높은 철탑을 세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太古的부터의 天國에 닿으려고 쌓던 바벨塔도, 하늘을 찌르는 고딕성당도, 사람들이 품고 있는 하늘에 대한 동경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높은 山이 많이 있는 나라에서는 별 신통한 생각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유럽 大西洋, 北海까지 散地四方으로 허허벌판과 구릉뿐인 파리의 센느江가에 우뚝 솟은 높은 탑을 세워 보겠다는 생각은 에펠의 머리에 그리어렵지 않게 떠 올랐을 것이다.

파리市가 센느강변을 만국박람회전시장으로 매번 이용한 이유는 전시장을 찾아 다녀야 하는 방문객을 페리 보트로 쉽게 운송해 낼 수 있는 교통수단 때문이었고, 파리 센느강변에 여러 중요한 대형 건축물들이 있는 것도,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때마다 강변에 세웠던 전시장들 중에서 허물기가 아까운 건물들이 남겨진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건물중에 하나가 에펠탑 건너편에 있는 인류학 박물관, 해양박물관, 극장, 씨네마떽끄(영화필림 보관소) 등등 문화시설이 잔뜩들어가 있는 반원형 빨레 드샤이오(샤이오 宮)이다.

분수와 함께 에펠탑을 더욱 돕보이게 하는 좋은 전망을 제공한 샤이오궁은 1937년 파리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것인데, 양쪽으로 날개처럼 벌린 건물위에 각각 회교사원의 미너렛 형태의 어울리지 않던 첨탑만 제거하기로 하고 허물기로 했던 건물을 남긴 것이다.

에펠은 탑공사를 시작하면서 프랑스는 이제 자유, 평등, 박애의 三色旗를 300미터 위에 높게 게양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외쳤지만, 동시대 유명지식인300명은 이른바, 탑높이와 같은 숫자를 가르킨 300이라는 항의문에 서명하고, 탑건설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인사들은 우리가 잘아는 샤를르 구노, 기드 모파상, 알렉산더 듀마 1세, 그리고 파리 오페라를 설계한 샤를르 가르니에 같은 大예술가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300명의 조립공들이 250만개의 리벳으로7000톤의 철재토막을 연결하는 아슬 아슬한 공중곡예를 보기위해서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이 날마다 공사장에 몰려왔는데, 구경꾼들 대부분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미련한 짓을 작난삼아 한다고 믿었으며, 심지어는 인근주민들 중에 저것이 언젠가는 넘어지고 말테지 하면서 동네를 떠나 이사가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공사는 2년후에 잘 끝나서 탑이름을 건립자 에펠로 정하고, 부르델이 만든 에펠의 흉상을 탑밑에 세워놓고 1889년3월 31일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서, 뉴욕 맨하턴에 크라이슬러 빌딩이 세워지는1930년까지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로 탄생됐다.

탑무게는 1센티평방당 4킬로그램으로 탑의 네다리에서 분산됐으며, 기온에 따라 높이에서 15센티의 오차가 생기고, 탑의 정상은 강풍에서 12센티 폭으로 흔들릴 것으로 정확히 계산됐다.

에펠은 30센티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그것을 한치도 틀림없이 정확히 확대시켜서 우아함과 견고성이 완전하게 일치된 경이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발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世間의 반향으로는 대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0세기 초에 와서야 현대성과 速力의 상징으로서, 또한 新世期에 맞춘 예술로서, 쟝 꼭또와 아뽀리네르는 詩로 찬양하고, 피사로, 듀피, 위트릴로, 스라, 마르께, 들로네, 샤갈은 그림으로 찬양했다.

무엇이든 유명한 것이면 모방해 내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들은 1958년, 에펠탑을 동경타워로 둔갑시켜 333미터의 높이를 가진 탑을 동경에 세웠다.

1567계단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런업 대회같이, 10분 이내의 기록을 세우려고 계단을 뛰어 올라 갈 필요는 없지만, 에펠탑의 전망과 구조를 즐기기 위해서는 1652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보거나 유유히 내려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리힘에 자신이 없는 방문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갈 때, 순식간에 펼쳐지는 파리와 파리근교의 놀라운 조감도로 인하여, 방금 小人國에 도착한 것같은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탑 꼭대기 에펠의 집무실에 가면 귀스타브 에펠과 토마스 에디슨, 두천재가 만나 환담하는 밀납인형을 보게 되는데, 에디슨은 새로운 발명품 유성기를 가지고 박람회에 출품하러 왔다가 탑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유성기 한대를 선물로 주면서 에펠과 만났다.

두 천재가 만나는 자리에는 300 항의문에 서명했던 샤를르 구노가 옆에 있었다.

귀스타브 에펠은 항의문 300에 동조하여 탑에 반대하는 인사들에게 2년동안 내내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내생각으로는, 이 탑은 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반드시 가질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은 엔지니어이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낱 엔지니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견고하게만 할 줄 알아서, 수명이 오래가도록 하려는 노력만 했지, 구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따져 볼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고, 그래서 우아한 탑으로는 절대로 만들지 못할 거라는 말씀들이시죠?

저 받침대들과 들보들이 갖고 있는 확고부동한 기능은 아름다움의 신비를 이루어 내는 조화의 조건으로는 부적당하니까 아름다움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그런 말씀들일 테지요?

에펠의 이 예언적인 언어, 기능의 미에 대해서는 한참 후 1919년이 되서야 비로소 바우하우스 학파에서 연구해야 할 문제로 제기됐다.

그런데 후세 건축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거나 사용하기에 불편한 건물을 신축해 놓고도, 그것을 실패작으로 자인하는 대신, 에펠탑도 처음엔 누구나 싫어하지 않았느냐는 문구로 자신들을 쉽게 비호하기 시작했다.

마치 졸작도 시간이 흐르면 걸작이 된다는 듯이 우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몽매한 세상사람들과 창작자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자임하는 비평가들, 그리고 메스콤에서 일하는 문화부서의 기자들은 예술의 진위를 캐고 가려서 세상에 전해주는 의무를 완벽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 진위를 구별할 줄 아는 참다운 식별력을 꼭 지녔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의 탄생을 돕는 길이다.

그렇게하여 감동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만이 예술임을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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