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1) - 공로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4199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8.03. 15: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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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1) -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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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6-7

특히, 한국 미술가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았던 베르나르 앙또니오즈의 10주기를 맞아 미술가들의 복지문제와 창작활동을 돕고자 한 그의 지대한 공헌과 업적을 여기에 적으며 그를 추모한다.

앙드레 말르로와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앙드레 말르로(Andre Malraux 1901-1976)와 베르나르 앙또니오즈(Bernard Anthonioz 1921-1994)가 콤비가 된 프랑스 문화성팀은 미술사에서 프랑스가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도 인상주의화풍을 인정치 못하고 오히려 푸대접 한 끝에 미국인들이 먼저 인정해서 작품들을 수집해 간 사실에 대해 통탄했다.

내가 뒤늦게 파리미술학교에 다닐 때인 1970년대까지도 미술학교 학생들은 비행기를 전세 내서라도 뉴욕이나 시카고 혹은 센트 루이스에 가서 인상주의화파의 진수를 보고 와야 한다고 프랑스를 향해서 조롱해 댔다.

프랑스가 몰라라 푸대접 하는동안 현대미술을 예고한 인상주의화파들의 작품80-90퍼센트가 헐값으로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인 수집가들 손에 들어갔다.

미국이 자존심 많은 프랑스를 제치고 미술의 중심국이 되기 시작하게 되는 것도 매번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프랑스 인상주의운동 이후의 새로운 경향의 모험적인 미술이 알게 모르게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가는 역사가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프랑스를 부르짖은 샤를르 드골 대통령은 제5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마자 정부부처에 처음으로 문화성을 창설하면서 ‘인간의 조건’, ‘희망’ 같은 소설을 써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중의 한사람이 된 앙드레 말르로를 문화성 장관에 임명하고 1959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프랑스의 위대함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문화정책을 펼치기 위해 안간 힘을 다 했다.

드골 대통령은 죽을 때 유언을 남겨, 무슨일이 있더러도 자기를 프랑스 위인들이 묻히는 빵데옹에는 절대로 넣지 말라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유서를 남기지 않은 앙드레 말르로는 그의 사후 20년이 된 1996년에 빵데옹에 들어감으로서 공식적으로 프랑스 위인중의 한 사람이 됐다.

빵데옹에 넣기 위해 그의 사후 20년을 기다렸던 이유는, 생전에 조국을 위해서 아무리 많은 공헌을 이룩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빵데옹으로 시신을 옮기는데 있서서는 조국에 대한 한치의 불명예스러운 점이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엄격한 심사원칙때문이었다.

조국에 대해, ‘詩 구절’ 에서처럼 ‘하늘을 울어어 한점의 부꾸러움’ 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인 것이다.

앙드레 말르로는 장관에 임명되자 같이 일해 줄 사람으로 레지스탕스 운동때의 동지였고 이제는 드골대통령의 조카사위가 된 베르나르 앙또니오즈를 문화성에 불러 들였다.

베르나르 앙또니오즈는 스위스에 인접한 프랑스 사부아 지방에서 조각가의 아들로 1921년에 태어난 대대로 내려 오는 사부아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의 앙또니오즈는 리용대학에서 2년간 수학한 때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교교육을 제네바에서 받았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 베르나르는 독일 점령 초기때부터 프랑스 독립을 위한 프랑스 특유의 명예로운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정의감에 불타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청년 베르나르는 많은 유태인 어린이들을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탈출시키는 위험한 일을 특히 도맡아 잘 해 냈으며 독일정부의 무작정한 검열로 인해서 소멸될 염려가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중요한 도서들을 수집해내서 안전한 장소로 옮겨 온전하게 보관되도록 하는 숨은 공로도 쌓았다.

그런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혈기가 또 남아서. 한편으로는 독일군의 검열을 피해 비밀책자를 인쇄하고 출판해 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냈다.

앙또니오즈는 자기의 은사이고 현직 교수인 작가 알베르 베겡에게 편집주간을 부탁해서 ≪ 론강의 수첩(Cahiers du Rhone) ≫ 이라는 비밀 정기간행물을 그의 레지스탕스 동지 두명과 함께 제네바에서 창간하는데 성공했다.

이 비밀책자, 론강의 수첩은 프랑스내에 은밀히 배포됐고 그래서 독일지배하에서 핍박받는 프랑스인들의 자유사상이 조금이라도 숨통이 터지는 그런 도피처로서의 역할을 이 책자가 하게 했다.

론강의 수첩 원고들을 구해 올 책임을 또 자청한 앙또니오즈는 루이 아라공과 뽈 엘뤼아르의 詩 그리고 철학자 쟉끄 마르뗑 이 넘겨주는 귀중한 기고문들을 받기 위해서 국경을 넘나들며 수시로 프랑스로 잠입해 들어갔다.

독일 패망후 스믈 다섯살 난 젊은청년 베르나르는 레지스탕스 운동때부터 사귄 용감한 동지인 동갑내기 즈느비에브와 1946년에 결혼했다. 즈느비에브는 샤를르 드골장군의 질녀였다.

독일지배하 레지스탕스 캠프에서 앙드레 말르로와의 우연한 만남은 젊은 앙또니오즈와 전일생의 앙또니오즈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매우 귀중한 두사람의 만남이었다.

드골이 창설한 문화성에서 1959년에 다시 만난 두사람은 문화란 모든 인류, 모든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화여야 한다는 문화에 대한 생각에 둘은 완전히 일치했다.

문화를 누릴 수있는 계층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문화를 누려야 한다는 이와 같은 문화에 대한 위대한 정의를 서로 따로따로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는데 대해서 두사람은 놀랐다.

문화에 대한 생각에 이렇게 일치된 두사람은 또한 국가는 예술가들이 창작에만 전념할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가지고 예술가들에게 해 줄수 있는 모든 봉사를 다 해 주어야 함은 물론이고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는, 예술가들에 대한 그런 철저한 신념을 가진 관료들이었다.

두 관료는 자기들의 조국, 프랑스의 위대함은 문화에 있었던 것이고 문화는 예술가들의 노고에 의해서 남겨지는 작품인 만큼, 자기들과 동시대에, 지금 같이 숨쉬고 있는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창작을 돕는 것은 프랑스 미래의 위대함을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학창시절 건축가가 되기를 원했던 앙또니오즈는 먼저 문화성 건축담당 부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그때, 스위스 태생 르꼬르뷔지에가 최초로 현대건축물로서 설계한 기념비적인 작품인 ≪ 빌라 사부아 ≫ 를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앙드레 말르로는 일반서민이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권위적인 미술관보다는 문화 보급과 문화혜택을 대중에게 넓힐려는 목적으로서의 세계최초의 형식인 다목적 문화원을 그르노블에 세우면서 지방곳곳에 그런 ‘문화원’을 연속해서 더 세울 계획을 했다.

그러나 이 ‘문화원의 모델’은 말르로가 창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에 인상주의화가들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수집해 간 반스박사가가 세운 필라델피아 근교 반스재단의 운영방침을 훌륭하게 모방한 ‘문화센터’였다.

말르로 장관은 건축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앙또니오즈를 조형예술창작 지원임무를 맡을 예술창작국장에 임명했다.

그때부터 앙또니오즈의 활동영역은 매우 다양해 졌다.

평생을 통해 그래픽 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던 앙또니온즈는 문화성에 들어 오기전에 유명한 스위스 스키라 화집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이미 마티스, 브락끄, 미로, 칼더, 마송, 샤갈, 쟈꼬메티, 발튀스, 보뎅등과 같은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어 왔다.

앙또니오즈 국장은 곧 미술가들에게 배급 할 아뜰리에를 신축하는 일과 외국 예술가들이 잠시 파리에 머물면서도 작품제작하고 연주생활을 할 수 있는 국제 예술인 촌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또한 예술인들의 집이라는 뜻인 ‘메종 데자시트( Maison des Artistes)’를 창설해서 고용주없는 자유직종인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따로 만들어 예술가들의 복지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제도의 빠른 확보는 예술가들이 안정된 직업인으로 활동하도록 하는데 기여할 중요한 사안이었다.

앙또니오즈 국장은 일정한 수입이 없어서 항상 불안한 미술가들의 위태 위태한 생계를 조금이라도 재정적으로 보충해 줄 수가 없을까 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거니와 극히 일부 행운의 예술가들을 제외한 예술가들의 99퍼센트라고 하는 수십만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은 고용인들의 최저임금보장제도로 최저보수를 받는 청소부나 우편배달부들의 수입보다 적거나 거의 없다시피한 것이다.

수입이 없어 쩔쩔매는 예술가들에게 부업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앙또이오즈 국장은 장인들과 기능공들만이 전통적으로 전담해서 일하고 있는 세브르와 같은 유명한 국립 도자기 공장과 고블렝, 보베 그리고 사본느리와 같은 국립 따삐스리 제작소에 미술가들을 참여시켜서 그들의 창작품도 그곳에서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정부가 역사에 남겨질 대규모적인 작품을 미술가들에게 주문하기 위해서 세계적 명성의 마크 샤갈에게 의뢰해서는 파리 오페라 객석 천장화를 그리게 했으며 앙드레 마송에게 의뢰해서는 오데옹극장 천장화를 그리게 했다.

뿐만아니라 앙또니오즈는 예술작품의 소모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공공건물을 신축할 때에는 건물 건축비의 1%를 반드시 예술창작품 제작에 사용도록 의무화하는 유명한 ‘1%법’ 을 제정했다.

그것은 신축하는 기차역 대합실이나 공항건물 대합실 혹은 관청건물의 현관의 벽 혹은 외벽을 장식하는 것같이, 옮겨질수 없는 북박이 벽화이거나 광장에 고정시켜 놓는 조각품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1%법은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에 도입해 가서 쓰는 법으로서 프랑스가
법의 적용에서 부작용을 최소화 할려고 공공건물만을 대상으로 실행한 반면, 우리나라는 공공건물이 아닌 일반 대형건물에 적용시키고, 북박이가 아닌 유동적일 수있는 예술작품에도 적용시키면서 1%법 운영의 묘를 적당히 찾지 못하고 악용되는 사례로 인해 문제가 많이 일어난다는 바로 그 1%법이다.

미술가들이 데뷰할때 첫 작품발표회를 열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정을 잘 아는 앙또니오즈 국장은 데뷰작가의 첫 개인전에 드는 비용을 부담해서 보조금을 지불해 주자는 기금을 창설했을 정도로 미술가들의 모든 문제점에서 자상 했다.

더 더욱 자상했던 점은 프랑스작가이거나 외국작가이거나를 불문하고 누구나 첫 전시회에 보조금을 지불받게 그 규정을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들의 지명도와 국적을 전혀 차별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세계 구석구석에서 온 모든 예술가들에게 적용된 평등한 원칙은 문화성에서 매년 일정량 사들이는 작가들의 예술작품을 구입하는데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뽕삐두 현대미술관이 탄생하기 전까지 앙또니오즈는 매년 5월말 자기의 집무실이 있는 파리 8구 베리에 街 메종데자티스트의 전시장과 정원에서 현존작가 전시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이 현존작가 전시회는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의욕이 표출된 동시대 미술가들에 의한 살아 숨쉬는 진정한 축제의 場이었다. 이러한 왕성한 예술창작의 움직임은 점차 국립현대미술센터(CNAC)로 구성 발전됐으며 1977년 현대미술관 뽕삐두 센터가 탄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발판이였던 것이다.

앙또니오즈는 1994년 72세로 작고하기까지 프랑스 전국에 22개의 현대미술지원기금망(FRAC)을 개설했으며 수많은 문화재단을 창설시키고 발전시키는 꾸준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베르나르 앙또니오즈는 존경과 우정으로 맺어진 예술가들과의 특별한 유대를 언제나 중요시하였고 오로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돕고자 하는 의지로 그의 일생 전부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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