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피라미드 (3)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6023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7.18. 15: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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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피라미드 (3)

2004-04-10


그랑루브르가 개관된지 얼마 안돼서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친구가 파리에 온다는 연락을 해왔다.

파리에 뛰어 오다시피 차로 달려온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그랑루브르를 구경하러 왔으니 문을 닫기전에 지금 루브르박물관에 당장 가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는 그랑루브르에 애태우듯이 급히 가보고 싶다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루브르박물관에 유리피라미드를 세웠다는데 그것을 어떻게 세웠길래, 그리고 또 박물관속을 어떻게 넓히고 개조 했길래 독일의 유명 주간잡지 스테른은 그 잡지책 전권의 반 이상을 할애해서, 무려 70여 페이지에 달하도록 그랑루브르 개관에 대한 기사를 특집으로 취급 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특집기사로 취급한 그렇게 큰 문화기사는 처음 일 뿐더러, 문화시설에 투자하고자 하는데는 매우 인색하기로 소문난 독일인들이 지금 그 프랑스로부터의 문화기사를 읽고는 깜작 놀라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정부가 그랑루브르를 만드느라고 퍼부운 예산을 쉽게 따진다면, 뉴욕에 있는 쌍둥이 빌딩을 두개나 세울 수 있는, 그렇게 많은 돈을 루브르에 쏟아 부운 것 인데 박물관 같은 보이지도 않는 잠재적 성격의 문화교육시설에 그렇게 많은 예산을 과감하게 마구 퍼붓는 프랑스정부의 대담한 문화정책을 최고최대로 평가하면서 독일정부도 독일의 후손들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문화정책을 거울삼고 배워야 되는게 아니냐는 주장을 스테른잡지가 매우 열정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마어마한 예산을 퍼부운 표시로, 지상위에서 볼수 있는 결과는 겨우 유리피라미드 하나뿐이라니 어떻게 된 심판이길레 그러냐 한다는 것이다.

루브르궁은 원래 거대한 직사각형 형으로 사방둘레를 철벽같이 삥 둘러친 모양의 무한궤도로 만든 대대적인 궁전이면서 그궁전 외양 자체가 애초부터 튼튼한 성벽처럼 만들어 졌다.

그래서 그튼튼한 성벽을 늑대사냥을 하기위한 성벽이란 뜻인 뤼빠라(Lupara)라고 불렸고 거기서 부터 유래하여 ≪ 루브르 ≫ 궁이란 명칭을 얻었다.

직사각형의 튼튼한 궁궐 안에는 다섯개의 안뜰이 생겨 났는데 그중에서 가장큰 안뜰이 꾸르 나폴레옹이다. 그 꾸르 나폴레옹을 비롯해서 꾸르 꺄레(Cour Carree), 꾸르 비스꽁띠(Cour Visconti), 꾸르 르퓌엘(Cour Lefuel), 꾸르 쀼제(Cour Puget) 그리고 꾸르 마를리(Cour Marly), 이렇게 네개의 작은 내정(內庭)이 루브르궁에 달려 있다.

지금 유리피라미드가 세워진 내정이 나폴레옹 꾸르인데, 나폴리옹 꾸르는 샹제리제 쪽을 향해서 뛸르리 공원을 가로 막고 있었던 루브르의 한변 건물이 1871년, 화재로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ㄷ字 모양으로 한쪽이 완전히 터져 버렸다.

재무성 청사가 차지하고 있었던 루브르궁 북쪽 건물의 쀼제 내정과 마를리 내정에 유리지붕을 씌워 전시장으로 만드는 설계를 포함한 박물관 마스터 플렌도 페이가 도맡아 설계하고 개조했다.

네모난 내정 궁전건물에 ㅁ자 유리천장을 얹어서 꾸민 전시장은 마치 온실내부와 같아서 그곳에 큰나무들을 배치하고 대형 조각품을 진열하고 관람객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벤치를 여기저기 놓은 모양이 건물안의 야외공원같은 분위기를 창조 했다.

페이가 내정에 유리지붕을 덮어 씌워서 전시장을 만든 것은 박물관을 더 넓힐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여름의 강한 햇빛을 천정유리창을 통하여 훨씬 누구러 트린 부드러운 빛으로 만들어 박물관 내부로 들어오게 함으로서 온화한 분위기를 창조해 낼 방편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성벽같은 궁전의 컴컴한 내부를 더 밝고 명랑하게 하기 위해서 북쪽편 루브르궁과 병행해 면해있는 리볼리 가 한길가에 면한, 많은 창살로 나누어진 구식창문을 간소화해서 단순하고 시원한 십자형 창살로 된 창문으로 간단히 바꾸었다.

한편 내정쪽으로 난 창문들은 아래위 사방으로 더 넓혀서 역시 십자형 창살의 대문짝 만한 붇박이 창으로 바꿈으로서 내정의 유리지붕으로부터 눈부시게 내려 쬐 들어오는 빛도 넓은 창을 두번째 통과하면서 전시장 내부로 은은히 흘러들어 오도록 할 목적에서 였다.

그래서 페이가 일한 리스리유 관의 전시실들은 다른관들 보다 내부가 훨씬 밝아졌고 시원한 감각을 띈 현대식 전시공간으로 변했다.

현대적 전시공간의 창조자 페이는 외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에너지를 낭비 하면서까지 인위적인 전깃불 조명만을 고집하는 요즘 미술관-박물관들의 대체적인 경향과는 반대로 자연광선을 끌여 들이고도 미술품들이 부드럽게 보이도록 하려는 이러한 마술을 부렸다.

프랑스 문화성에서는 얼마전, 페이의 아이디어에 따라 드농관의 비스꽁띠 내정에도 유리천장을 씌울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제적인 현상모집에 의해 설계를 공모 하겠다고 할 정도로 페이가 해 논 일에 만족하고 있다.

페이가 기존 창문을 대형화하고 철조골격으로 무게깨나 나가는 유리천장을 건물에 얹어 걸쳐 놓을 수 있었던 그런 공사는 두꺼운 벽의 루브르 궁이 성벽처럼 튼튼하여 그것을 지탱해 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벽을 따라 올라가야만 하는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때에도, 꽉 막힌 벽을 원형(圓形)으로 뚫어 중국식 원형공간을 창조해 놓고 답답했을 시야를 넓혀 줬음으로서 해서 관람객들이 페쇄된 궁궐안에 있다는 갑갑함을 느낌수 없도록 세심히 배려 했다.

영국 봉건주의 시대에서는 한때, 백성들에게 어떤 기준으로 잘 살고 못사는 척도를 따지며 세금을 물려야 할지 몰랐을때 집에 유리창이 몇개 달려 있나를 따져 빈부차이를 헤아렸고 세금을 물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 원시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페이가 뜯어 고친 유라가 많은 리스리으관은 매우 부자나라의 박물관처럼 보일 것이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에, 바보나라 사람들이 집이라고 다 짓고 보니 창문을 미쳐 만들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집속이 영 캄캄해서 살 수가 없어서 생각다못해 모든식구들이 차례대로 세수대야를 들고 밖에 나가 햇빛을 쬐어 받아 담은후 뚜겅을 얼핀 닫고 집으로 다시 뛰어 들어 와 뚜껑을 열곤 하는 정말 바보같은 반복을 하루종일 했다는 우수운 얘기가 있기도 하다.

페이는 루브르 박물관 확장과 유물이 우연히 나온 무진장한 지하공간을 박물관 전시실 시설로 창조해 내면서 빛이라는 명제를 열쇄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빛을 지하로 끌어드린 유리피라미드를 완성한 페이는 유물이 나온 지하공간을 시공회사인 미셀 마카리(Michel Macary)에 의존해서 공사를 시작했다.

미셀 마카리는 페이의 전문시공회사인데 미셀 마카리의 토목건축술은 유물이 나온 지하공간에 엄청나게 큰 볼륨을 창조해 냈다. 그 큰 볼륨 속에는 가령 고급 상점가, 특별전시장, 강당, 629대의 승용차와 80대의 관광버스를 수용하도록 한 지하주차장 등등의 박물관 부속시설들이 넉넉히 들어가 자리를 잡고도 남는 공간이다.

그렇게 된 웅장한 매머드 콩크리트 지하공간위 지상에 까루젤 개선문이 있다고 해서 그지하공간을 ≪ 까루젤 뒤루브르 ≫ 라고 따로히 명명했다.

현대식 그 화려한 지하궁전, 까루젤 뒤루브르 속에는 유명한 오뜨꾸뛰르 페션쇼, 현대작품을 위한 사롱전 등 괄목 할만한 각가지 문화행사가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파리에서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했다.

그 명소, 십자형으로 된 회랑에 또한 외광을 끓어 드리기 위해서 페이는 기발한 착상을 또한번 발휘했다. 그것이 또하나 유명하고 유별나게 된 꺼꾸로 매달린 유리 역피라미드이다.

그 역피라미드는 십자형 회랑 한복판 천정에 불안정하게 달려 있는 듯하다.

나폴레옹 꾸르에서 유리피라미드 입구를 통해 박물관에 들어와 나선형 계단으로 내려가면 나포레옹 홀인데 그홀에 내려온 관람자들은 박물관 안내지도책자를 찾고자 안내소로 향할 것이다.

안내소에서 박물관 지도를 받아든 관람자들은 안내소 뒷쪽, 깊숙한 회랑을 통하여 회랑에 꽉차서 넘친 거대한 역삼각뿔형 수정덩어리를 보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관람자들은 그것이 하늘의 색갈을 안고 있는 유리로 된 역피라미드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꺼꾸로 매달린 유리 역피라미드는 그의 심장안에 하늘빛을 그대로 껴 안고 있으면서 사방 밖으로 빛을 은은히 내뿜고 있는 것이 커다란 하나의 수정체 인양 보이며 그 형체가 매우 신비할 것이다.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전 내부에 빛을 끌여 들이기 위해, 궁전건물과 궁전건물사이에 일부러 틈을 내어 빈공간으로 창조해서 빛이 아래층까지 들어 끌려 내려 오도록 한, "빛의 우물" 을 만드는 지혜를 미노스 국가 건축가들이 발휘했다면, 페이도 프리즘 역할을 하면서 빛을 지하에 끌여들여 내뿜도록 한, 유리로 된 역피라미드를 천정에 메달아 놓아 빛이 그속에 고여있도록 한, 또하나의 색다른 "빛의 우물" 을 만든 것이었다.

콩크리트 지하궁전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유리 역피라미드의 빛은 고체덩어리로 얼린 빛처럼, 그 빛은 차갑고 투명하다.

역피라미드에서 사방으로 은은히 뿜고 있는 신비한 빛으로 인하여 사방에서 그곳으로 시선이 집중되면서 마치 대성당의 십자형 중앙홀 인듯 착각하게 한다.

나는 페이가 피라미드를 꺼꾸로 해 놓은 까닭에 대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면서 육신은 땅속에 묻히는 것이고 영혼은 하늘에 올라간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피라미드는 육신을 위한 지상의 무덤이고 역피라미드는 영혼을 위한 우주의 무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꺼꾸로 매단 피라미드를 올려다 보면서 하늘은 영혼의 무덤이다로 해석한 페이의 기막힌 연출에 나는 나대로 감탄하고있는 것이다.

1993년, 그랑루브르가 개관된 직후 일본 천황부부가 처음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일본천황은 프랑스에서 꼭 보고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방문 스케쥴에 꼭 그랑루브르 방문을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천황은 파리를 향하는 비행기속에서 프랑스정부가 남에게 지금 제일 자랑하고 싶어서 못 견뎌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었는데, 누가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서 죽겠을 것을 보여 달라고 할때 그런 요구가 상대방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 것인지 정곡을 짚어 생각해낸 것이다.

빡빡한 일정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미쳐, 그랑루브르 방문을 일정에 넣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는 얼마나 좋았던지 천황의 마지막 하루의 일정이 끝나는 날, 밤 11시에 그랑루브르 문을 활짝 열고 박물관 전직원이 다 나와서 천황을 맞이했다.

근무시간 이외에는 별도로 일하기를 죽어라 싫어하는 프랑스인 관습으로는 여간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4월 7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유로스타 편으로 도바해엽을 건너 파리에 도착해서는 그의 바쁜 일정속에서도 그랑루브르 방문을 빼놓지 못했다.

에리자베스 2세가 프랑스를 방문한 일은 역사적으로 두고 두고 앙숙관계였던 불란서와 영국이 1904년, 이제는 양국간의 싸움을 그만하고 화평하게 지내자는 영불화친조약(Entente Cordiale)을 체결한지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였다.

개선문 무명용사 묘지 참배, 한군데만을로 정한 전형적인 파리의 야시장 구경, 그리고 뚜르즈에 가서 에어버스 제작공장을 방문하는 것이 영국여왕 프랑스 체류 일정의 전부였었지만...

1993년, 유리 역피라미드까지 준공한 페이는 무려 10년동안 일하고 있던 루브르박물관을 이별하고자 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페이는 박물관 확장에 참여해 그동안에 해논 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라스베가스에 있는 어느 한 호텔앞 광장 지하주차장에 빛을 집어넣기 위해서 천정창으로 ™“아난 검은색의 조그만 피라미드를 준공하는 날이기도 했다.

페이는 파리에서는 무슨까닭으로 피라미드를 투명하게 했으며 빛이 넘치는 네바다(Nevada) 에선 왜 선글라스를 낀, 검은 피라미드로 만들었는지도 설명했다.

10년이란 세월을 루브르에서 보낸 페이는 긴시간 차근차근히 설명을 끝내고 기자들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었을 때 만장한 기자들은 질문할게 하나도 없다면서 모두 일어나 장내가 떠나가도록 긴긴 박수를 보내서 루브르박물관에 공헌한 그의 노고와 건축가로서의 성공을 찬양해 주었다. (끝)

* 유리피라미드 1, 2, 3 은 나의 블로그에도 옮겨져있으며 유리피라미드 사진들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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